[장자07]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길게 늘여 주어도 괴로움이 따르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 주어도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자를 것이 아니며, 본래 짧은 것은 늘일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인의|仁義|가 사람들의 본래적 특성일 수 있겠습니까? 저 인|仁|을 갖춘 사람들, 괴로움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변무>

<변무>편은 외편에 속합니다. 장자의 후학들이 지은 겁니다. 보통 어떤 조직이든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는데, 장자의 후학들도 이렇게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 이야기는 아마 강경파 쪽에서 만든 이야기 같습니다. 제가 강경파라 함은 유가의 윤리를 철저하게 배격하여 윤리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윤리 이전의 원시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이런 생각은 장자의 생각과 조금은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내편의 여러 글들을 보면 대체로 윤리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유교적인 인의 자체를 완전히 거부합니다.

이런 경향은 <도척> 편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공자가 천하의 도둑 ‘도척’을 만나 그를 설득하려다가 오히려 도척에게 혼쭐이 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해도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자였다면 그렇게 힐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앞서 다리 잘린 숙산무지가 공자를 찾아갔다가 면박을 당하고 와서 노자에게 공자를 욕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도 자세히 읽어보면 공자가 자신의 잘못을 바로 깨닫고 자세를 낮추고 사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음이 상한 숙산무지가 그냥 돌아갔지만 제자들에게 숙산무지를 높이 추켜세우고 제자들에게 더욱 정진하라고 가르치는 공자의 대인다운 풍모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편에서는 공자가 장자의 사상을 대변하는 성인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까닭에 <변무> 편은 조심해서 읽어야할 것 같습니다.

비록 강경파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그 근거로 든 예는 참 문학적이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길게 늘여주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주어서는 안 된다는 표현이 참 멋집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는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는 이야기이지요. 한편 이 이야기는 앞으로 다룰 ‘소통’의 관점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오리의 다리가 짧고, 학의 다리가 길게 느껴지듯이, 남들을 볼 때 자신의 선입견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와 달라 보인다고 해서,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면 안 되듯이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야만 서로 통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죠. 서로 통하는 것, 이걸 소통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장자>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 세 편을 가볍게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장자>를 읽어보겠습니다.

(내일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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