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물고기가 거대한 새가 된 이야기를 읽고 의견을 주신 분이 계십니다. <장자>를 분석적으로 읽을 때 주의할 점과 의역본보다는 가급적 직역한 것을 읽으라는 조언까지 해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이 글에서 원문을 인용할 때는 제 나름대로의 의역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물론 한자 원문까지 참조하여 원문의 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윤문한 것입니다. 참조한 서적은 지지난 회차 독서노트에 밝혀두었습니다.
<장자> 제1편 <소요유>에 이어 제2편 <제물론>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장자> 전편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이야기를 일명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고 합니다. ‘호접’이 나비이니 우리말로 ‘나비의 꿈’이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물화|物化|’라고 한다. <제물론>
이 이야기로 인해 예로부터 장자를 ‘몽접주인|夢蝶主人|’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 말로 ‘나비 꿈 선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장자와 <장자>를 이해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나비의 꿈’을 통해 장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얘기일까요?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장자>를 몇 번 읽어보면 ‘덧없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기존의 상식을 흔들어 우리의 고정 관념을 깨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속세를 떠나라고 하지 않습니다. 꽥꽥 우는 거위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붕새 이야기를 하면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핵심은 ‘물화|物化’입니다.
장자가 보기에 세계는 ‘이것’과 ‘저것’으로 나뉘어있지 않고, 모든 것이 얽히고 설킨 관계, 즉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세상입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라고 했듯이 그 차이는 인정하면서도 결국은 하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로 넘나드는 것을 ‘물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 즉 물화를 언제 알 수 있을까요?
장자는 꿈에서 깨어나서야 자신이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꿈이 꿈인 것을 알기 위해서는 깨어나야만 알 수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와야 자신이 물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압니다. 경상도 사람은 서울에 올라와서야 자신이 쓰는 말이 사투리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견입니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떨어질 때만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낯선 것과의 부딪침,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자신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앞으로 계속되는 장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낯설어지기’를 요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낯설어지지 않고서는 결코 나의 고정된 생각, 선입견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입견을 떨쳐버리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상대방과 소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 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