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08] 나를 움직이는 또 다른 나, 초자아

밤새 비피해는 없으셨는지요. 제발, 이제 좀 그만 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부터는 <장자>를 ‘소통과 실천’의 관점에서 ‘철학하기’를 본격적으로 시도합니다. 제대로 성공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설프게 보이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초자아’에 대한 개념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회적 기준’ ‘선입견’ ‘고정관념’ ‘내 마음 속의 사회적 규칙’ 정도의 개념인데, 앞으로 ‘소통’을 이야기할 때 꼭 필요한 개념이라, 다소 딱딱하더라도 짚고 넘어가야할 것 같습니다.


뚱딴지같은 질문 하나 할게요. 혹시 당신은 당신의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있다구요? 그럼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몸의 구조상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거울에 비친 모습밖에 없지요. 그 비친 모습을 보고 자신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과연 확신할 수 있는 걸까요?

만약 거울 앞의 나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같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거울 앞에서 거울을 보는 나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A라고 하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A’라고 하면 A와 A’가 동일하다는 것을 지켜보는 B라는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럴 수는 없겠죠.
이론적으로 우리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면서 마치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인가요? 굳이 이것을 증명해야 하나요?
증명할 필요도 없이 ‘현실적으로(!)’ 우리는 거울 속의 모습이 자신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바라보는 B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정신분석학 이론에 의하면 실제로는 없지만 상상 속에 있는 B의 자리를 ‘초자아(superego)’라고 부릅니다. 좀 어렵지만 초자아라는 개념은 앞으로 중요하게 다뤄지니 예를 하나 더 들어보죠.

어렸을 때 동화 피노키오를 읽은 사람 중에 거짓말을 하면 정말 코가 길어지는 줄 알았던 사람이 분명 있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또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참 나쁜 행동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알았을 것입니다. 그 후로 나이가 더 들어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거짓말은 안 좋은 행동이라고 우리는 믿게 됩니다. 누구에겐가 거짓말을 하는 순간 마음속에서 ‘이러면 안 돼. 이건 나쁜 짓이야’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만화적으로 표현하자면 내 머리 위에서 천사가 나타나서 ‘그러면 안 돼!’라고 하는 것이죠.

이렇게 내 마음 속에서 나의 행동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는 또 다른 나, 즉 내 머리 위에서 맴돌며 나에게 사사건건 참견하는 천사를 ‘초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 속의 기준 또는 규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으니 무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초자아가 나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 초자아라는 것이 없다면 우린 아무런 행동도 못하게 됩니다. 초자아는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은 이유, 내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알려 주는 역할을 합니다.
학생이 아침에 귀찮지만 일어나는 이유는 학교에 가야하기 때문이고, 어른들은 회사에 가야하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회사에서 혼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 속의 또 다른 나인 ‘초자아’가 나의 행동을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거죠. 초자아는 사회 속에서 살면서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갓난아이가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엄마의 사랑을 받는 방법입니다. 이 아기는 엄마가 자기를 낳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엄마에게 사랑받고자 노력합니다.
처음에는 울음이 무기입니다. 자신을 본체만체하던 엄마라도 막 울면 다가와서 안아주고 달래줍니다. 아이는 이것이 엄마의 사랑을 받는 줄 아는 것이죠.
그러다가 점점 의식이 생기면서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방법들이 변해갑니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점점 ‘엄마가 좋아하는 것’과 ‘엄마가 싫어하는 것’이라는 뚜렷한 판단 기준이 생기게 됩니다. 아이는 이렇게 커갑니다. 결국 아이는 엄마라는 ‘초자아’에 맞춰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죠.

이것을 확대해본다면 결국 우리가 원한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부모님의 바람 때문이겠죠. 만약 그 차원을 넘어서 정말 스스로 원해서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어디까지나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겠죠. 공부를 잘해야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고,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곳에 취직해야 남들 보기 떳떳한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자끄 라깡(Jacques Lacan)이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이 바라는 것만을 바란다’라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바라는 것, 이게 사실은 내 마음 속에서 내가 바라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초자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남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르면서 그들이 바라는 대로 살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현실 자체가 어쩌면 꿈인지도 모릅니다.
장자의 ‘나비의 꿈’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물화|物化|(사물의 변화)’라고 한다. <제물론>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다시 보니 장자의 이런 말이 단순히 말장난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그는 꿈속에 있지 않고 깨어난 것입니다. 깨어서 보니 이전의 자기모습이 마치 꿈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던 것들이 결국은 꿈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또 중요한 것 하나!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조차도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온전히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죠. 서로가 서로의 꿈을 꾸며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끼리 충돌이 없을 수 없겠죠. 장자는 아마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자는 현실이 꿈이라고 말하면서도 ‘인생은 일장춘몽’식의 허무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을 잊은 채 남들의 바람대로 얽히고 설키어 사는 어지러운 인간세를 떠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현실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때 그는 공자의 입을 빌립니다. 아무래도 현실을 실감나게 얘기할 때는 공자를 내세우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가 봅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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