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01] 퇴색한 유가

어젯밤 축구 경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실로 그처럼 짜릿한 드라마는 보기 힘들 것입니다. 광기에 가까운 축구 열풍을 경계해야겠지만, 그게 그리 쉽지 않아 보입니다.

오늘부터는 <맹자>를 보겠습니다.
참고한 서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민정,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 태학사
신영복, <강의>, 돌베개 (<논어> 참고도서와 중복)
송영배, <제자백가의 사상>, 현음사 (<논어> 참고도서와 중복)
풍우란, <중국철학사>, 형설출판사
김재욱, <맹자, 제멋대로 읽기>, 포럼
장기균외, <중국철학사>, 일지사
박일봉, <중국사상사>, 육문사
알프레드 포르케, <중국고대철학사>, 소명출판
송영배, <중국사회사상사>, 사회평론
이기동, <맹자강설>, 성균관대출판부
양구오롱, <맹자평전>, 미다스북스

특히 위의 세 권의 책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학교 교육의 덕택으로 ‘맹자|孟子|’하면 몇 개의 단어가 자동적으로 떠오릅니다. ‘왕도정치’, ‘성선설’, ‘호연지기’, 조금 더 나아간다면 ‘맹모삼천지교’까지. 이런 까닭에 맹자는 공자와 더불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또한, 익숙하지만 고리삭고 따분하기는 공자와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공자에 대한 고리탑탑한 편견을 깼다면, 이번 시간은 맹자 차례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역동의 시대였습니다. 무수한 사상가들이 들고나던 때였습니다. 춘추시대에 공자가 독보적이었던 반면 전국시대에는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이었습니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들고났습니다. 중원의 패권과 영역 다툼만큼이나 사상의 투쟁도 격렬했습니다. 오늘날 ‘고전’이라 불리는 것들은 당시의 치열한 현실 정치 이론이자 현대 사상이었습니다. ‘고전’이라는 말 속에 풍기는 적막함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맹자>만 보더라도 <논어>에 비해 매우 역동적입니다.

시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사상가들, 맹자도 처음에는 그 중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가 왜 성인에 버금가는 아성|亞聖|의 경지에 올랐는지, 그가 남긴 <맹자>라는 저서가 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생명력을 발휘하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논어>를 보면서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봤으니, 이번 시간에는 맹자가 살았던 시대와 맹자의 삶에 대해 간단하게만 짚어보고 난 후, 맹자의 사상에 대해 보다 깊이 알아보겠습니다.

전국시대, 퇴색한 유가

공자는 춘추시대, 맹자는 전국시대의 사람입니다. 춘추시대가 사상의 동면기였다면 전국시대는 사상의 전쟁터, 마치 정글 숲과도 같았습니다. 춘추시대에도 여러 학파가 있었지만 오직 공자의 유가만이 꽃을 피웠습니다. 다른 학파들은 겨울눈|冬芽|처럼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전국시대가 도래하자 하룻밤 사이에 춘풍이 불어와 도처에 녹음이 우거지고 백화가 꽃을 피우듯 다채롭게 전개되었습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진|晉|나라의 한씨, 조씨, 위씨 가문이 각각 독립하여 한, 위, 조나라를 세울 때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구분은 사상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진나라가 세 개의 나라로 쪼개지는데 왜 갑자기 잠자던 사상들이 만개했을까, 이렇게 해서 의문을 풀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전국시대의 가장 큰 특징을 서주 시대의 종법제도의 의한 봉건제가 무너졌다는 데서 찾아야 합니다. 혈연에 의한 땅 나눠먹기 시대가 가고, 힘에 따라 뺏고 빼앗기는 완전한 약육강식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서주 초기에 70여개에 달하던 제후국들은 결국 7개의 강력한 나라와 몇몇 군소 제후국들로 압축이 됩니다. 이 중 강대한 7개의 나라를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합니다. 훗날 칠웅 중의 하나였던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그야말로 하극상과 음모, 배신과 야합, 합종연횡이 판치는 난세 중의 난세였습니다.

군주는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력을 키우는 데 집중합니다. 춘추시대 때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사|士| 집단이 전국시대에 와서는 그 세력이 커져 권력을 형성합니다. 군주는 이러한 사|士| 출신의 학자들을 대거 초빙하여 국가 경영을 위한 고견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불문율처럼 상례화되었습니다. 학자들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세하고, 군주의 눈에 들면 대부의 자리를 얻어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군주가 학자를 초빙하여 고견을 듣는 것은, 그들이 학문을 매우 좋아해서라기보다는 하룻밤에 나라를 잃을 수도 있는 난세에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맹자도 그 수많은 학자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맹자>를 보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많은 왕들을 만나 얘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당시 이미 유명해져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보건데, 왕이 관례적으로 몇 번 만났던 것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이름이 난 사람이라면 누구든 만나주던 때였으니까요. 실제로 맹자 생존 당시 민간에는 양주학파와 묵가의 사상이 유명했습니다. 군주들은 군주 중심의 강력한 법치를 외치는 상앙 등의 법가 사상에 매료되었습니다. 반면 사방이 전쟁인 난리통에 임금이 어질면 나라가 저절로 부강해진다는 유가의 주장이 먹힐 리가 없었습니다. 유가는 겨우 그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습니다.

군주가 보기에 유가의 대답은 늘 뻔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장 나라의 힘을 키울 수 있을지를 물으면, 왕이 먼저 어진 마음씨를 가지고 백성을 잘 보살피면 저절로 나라의 힘이 강해진다는 말만 돌아왔으니 어떤 왕이 좋아했겠습니까. 집에 가는 길에 불량배에게 흠씬 맞아, 무섭기도 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활활 타올라 격투기 도장을 찾아갔더니, 원하는 싸움 기술은 안 가르쳐주고, 마음을 수양해서 동네 불량배들을 감화시키라는 말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공자의 명성은 퇴색하고, 맹자가 살던 당시 유가는 주류에 끼지 못하는 비주류 군소정당으로 머물렀습니다.

(내일 이어집니다…)

* 사이트에는 계속 연재하고, 독서노트 메일은 일주일치를 묶어서 다음 주 월요일 경에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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