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축구를 보셨나요? 또 앞으로 한동안 히딩크 열풍이 불 것 같습니다.
저는 전반전만 보고 잤습니다. 정작 중요한 후반전 역전 드라마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필드에서 뛰는 선수는 선수대로, 저는 저대로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요.
오늘, 드디어 논어 마지막 회입니다.
[논어강독 7] 군자 : 제너럴리스트 vs. 스페셜리스트
앞에서 군자는 화|和|의 입장이고 소인은 동|同|의 입장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논어> 전반에 걸쳐 군자와 소인의 비교가 많이 보입니다. 군자는 어떠한데 소인은 어떠하다는 식의 대비가 상당히 많습니다. 스무 편 중에서 약 70여 차례나 등장합니다. 이런 까닭에 <논어>를 ‘군자학’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군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군자와 대비되는 ‘소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것에 대한 명쾌한 답은 없습니다. 언어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 용법이 바뀌고 그 의미하는 바가 확장되거나 축소되어 원래의 의미와는 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군자와 소인이 바로 그러한 예입니다. 오늘날에는 실생활에서 군자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소인이라는 말도 쓰지 않습니다. 소인배라는 말이 쓰이긴 하지만, 간사하다는 의미가 많이 내포되어 있어 <논어>에 나오는 소인과는 그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군자에 대한 여러 설|說|들을 종합해보면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먼저 군|君|은 군주|君主|와 같은 뜻으로 ‘통치자’로 볼 수 있습니다. 공자 시대의 왕과 제후를 뜻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이때의 자|子|는 존칭입니다. 그런데 자|子|를 말 그대로 아들로 해석하면, 군자는 군주의 아들이 됩니다. 당시는 혈연에 의거한 지배 체제였으므로, 군주의 아들은 곧 일가의 모든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군자는 귀족 또는 관료 등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군자는 특정한 신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덕이 많은 자 또는 훌륭한 사람 등을 통칭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훗날 주인, 남편 등으로까지 의미가 확대됩니다.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논어>에서 쓰인 각 개념의 명쾌한 정의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인|仁|, 도|道|, 예|禮|, 덕|德|, 군자|君子|, 소인|小人| 등. 참으로 불친절한 <논어>를 해석하기 위해 우리는 고증과 상상력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논어>에 대한 해설서만도 3,000 여 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 같은 이도 감히 <논어>를 논하는 축에 끼어 훈수를 둘 수 있는 것이겠지요. 보다 더 전문적인 것은 전문가에게 맡겨야할 문제이고, 제 생각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군자를 특정 신분을 지칭하는 말로 보지 않습니다. 또한 그 뜻이 고정된 단어로 보지 않습니다. 앞서 학|學|의 의미를 살펴볼 때도 언급했듯이, 이때는 학|學|이라는 개념이 형성되는 시기였습니다. 물론 학|學|이라는 글자 자체는 이미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학|學|의 의미는 공자에 의해 다시 만들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군자|君子|라는 말도 이미 당시에 널리 쓰이고 있는 말일지 모르겠으나, 공자에 의해 그 용법이 바뀌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공자는, 당시 새로 떠오르는 사|士| 계층을 군자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논어>를 정치학으로 보자면 군자는 곧 관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료이되 개인의 이익에 집착하지 않고 천명을 받들어 덕치를 행할 수 있는 관료라면, 이미 그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관료의 한계를 벗어난 것입니다. 군자는 곧 덕과 지혜를 겸비한 훌륭한 사람의 총칭인 것입니다. <논어>에서 군자와 소인을 비교해 놓은 여러 구절을 보면, 각 상황마다 해석을 조금씩 달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군자라는 뜻을 하나로 고정시켜놓고 전체를 해석한다면 말이 안 되는 해석이 수두룩할 것입니다.
군자를 덕과 지혜를 갖춘 사|士| 또는 관료, 또는 제후와 왕이라고까지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음 문장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子曰, 君子不器.
자왈, 군자불기. <위정2-12>
<논어>가 아무리 압축 파일이라지만, 저런 식으로 써놓으면 참으로 난감합니다. 여기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이 고전을 읽는 묘미이기도 합니다. 다빈치 코드가 아니라 공자 코드를 풀어 봅시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군자는 그릇과 같이 용도가 한정된 존재가 아니다’입니다. 그릇은 밥을 먹든 물을 마시든 이미 형태가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확대하면 하나의 기술에 익숙한 숙련공 또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옮기면 스페셜리스트. 현대 자본주의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막스 베버는 철저한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논어>의 이 구절을 들어 동양 사회는 전문성을 거부하는 비합리적인 사회로 규정했습니다. 막스 베버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전문성은 곧 효율성이며 경쟁입니다. 자본주의에서 꼭 필요한 속성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전문성은 언제나 아랫사람이 갖추어야 할 능력이었습니다. 도자기를 굽고, 철을 다듬고, 불상을 조각하고, 탑을 세우고, 수레를 만들고, 마차를 몰고 ……. 윗사람은 그저 시키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막스 베버가 말한 전문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하층민을 위한 직업윤리일 뿐입니다.
한편 자본주의 경영학의 대부 피터 드러커는 생전에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너럴리스트라는 비판을 줄곧 받아왔습니다. 제너럴리스트는 특정 분야에 한정되지 않고 두루두루 유능한 사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스페셜리스트의 시대라고 하여 모두 스페셜리스트를 동경하면서, 제너럴리스트는 마치 두루두루 사용할 수는 있어도 막상 어느 분야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대중적인 지적 노동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터 드러커가 남긴 경영학의 업적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학습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가 만약 스페셜리스트에 머물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일본의 저널리스트이자 독서광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처럼, 그것은 어디까지나 낮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를 가리키는 표현일 뿐이며, 스페셜리스트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도 존재하며, 사회의 모든 시스템은 결국 제너럴리스트가 움직이고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제너럴리스트가 될 것인가, 아니면 스페셜리스트가 될 것인가를 고민하셨나요? 2,500년 전에 공자가 했던 ‘군자불기’라는 단 네 글자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전문성에 관한 논의가 불을 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보면, 위의 논의는, 제너럴리스트이든 스페셜리스트이든 간에 정작 ‘인간’에 대한 고민은 빠져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느냐는 비인간적인 성격의 논리입니다.
이렇게 읽어보면 어떨까요. 군자를 군주의 명을 받은 자, 즉 전문 관료라고 한다면, ‘관료는 그릇이 아니다’는 말로 해석될 것이고, 이를 확대하면, ‘관료는 군주가 제멋대로 쓰는 도구가 아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군자는 왕과 제후 등의 귀족이나 일반 평민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지키며 천명을 따르는 존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춘추전국시대에 사|士|라는 계층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공자의 집단이 철저하게 사|士| 집단이라고 했습니다. 사|士|는 제3계급입니다. 귀족도 평민도 아닙니다. 따라서 공자의 사상은 제3계급의 사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士|가 비록 군주를 도와주는 일을 맡고는 있지만 군주만의 도구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에게는 천명을 받들어 군주와 백성을 보필할 의무가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철저하게 보수적이라고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는 유가가 실제로는 당시 떠오르는 신진 계층의 이해를 대변한 진보적 집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이상적인 선비|士|의 유형, 그것이 바로 군자|君子|입니다.
여기까지 <논어> 강독 끝. 무언가 아쉽습니다만, 허전한 것은 직접 원전을 통해 보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논어>는 읽는 사람에 따라, 읽는 시기에 따라 늘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저처럼 직접 <논어> 강독을 해보시는 것이 어떠할른지요.
끝.
(내일부터는 <맹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