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의 동호문답

결혼을 하여 신접살림을 차린 곳이 서울 금호동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집은 헐리어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옥수역에서 내려 강변북로 옆길로 걸어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길 옆으로 성북-용산간 국철과 나란히 달리는 길이 있었는데 독서당(讀書堂)길이라고 했습니다. 독서당은 조선 전기 때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장소였습니다. 내릴 사(賜), 겨를 가(暇), 즉 왕이 휴가를 하사하여 편히 독서할 수 있도록 만든 곳입니다. 오늘날 대학 교수들에게 주어지는 연구년과 같은 연구 휴가제도입니다.

용산 근처의 한강을 남호라고 했고, 지금의 동호대교 근처 옥수동 인근을 동호라고 했습니다. 마포 어귀를 서호라고 했습니다. 이 동·서·남호 근처에 모두 독서당이 있었습니다. 동호에 세워진 독서당을 동호독서당, 줄여서 동호당(東湖堂)이라고 합니다.

동호, 즉 한강과 북쪽에서 흘러들어오는 중랑천의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을 두물개, 두뭇개, 두멧개라 했고, 한자로 두모포(豆毛浦)라 썼습니다. 여기에 몇년 전 확장한 두무개길이 있습니다. 이곳은 야경이 참 멋집니다.

옛생각이 나서 잠시 잠시 옆길로 샜습니다. 각설하고, 오늘 소개드릴 책은 율곡 이이의 《동호문답》입니다.


   제   목 : 이이 동호문답
   지은이 : 율곡 이이 / 안외순 옮김
   펴낸곳 : 책세상 (초판 출간일 2005.5.30 / 초판 1쇄를 읽음) ₩4,900


사가독서 혜택을 받은 사람은 독서당에서 연구 휴가를 마치고 과제를 제출했습니다. 이를 월과(月課)라고 했습니다. 《동호문답》은 율곡이 동호독서당에서 사가독서를 마친 뒤 임금께 올린 월과였습니다. 그 때 율곡의 나이 34세, 당시 임금은 선조, 즉위하고 2년된 해(1569년)였습니다.

왕위에 오른 지 만 2년밖에 안 된 새 군주인 선조에게 청년 관료 율곡이 새 정치를 희망하며 쓴 글입니다. 젊은 율곡의 눈에 비친 조선의 정치는 암담했습니다. 그것을 개혁하고자, 자신의 개혁 포부를 담아 쓴 정치 개혁서가 바로 《동호문답》입니다.

분량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책세상 문고의 문고판 시리즈 중의 하나이니까 부담 없는 분량입니다. 그러나 옛글을, 그것도 조선시대 문인이 군주와 신하의 길, 당시의 정세와 안민정책, 교육정책을 논한 글을 굳이 찾아 읽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책을 왜 읽어야하는지 의문도 생길법 합니다.

별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읽는 거지요. 이런 책도 읽다보면 맛이 있습니다. 비록 시대가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고민하는 주제는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조는 신하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학문이 뛰어나고 평판 좋은 사람을 등용하여 그들의 말을 듣고 싶어는 했으나 막상 실천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율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율곡에 대한 선조의 마음은 차라리 변덕스럽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선조 9년에 율곡은 사직하고 파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당시 영의정 박순이 율곡의 어질고 재주 있음을 들어 그를 다시 부르라고 수차례 간청했습니다. 그 때 선조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나라) 가의(賈誼)는 글을 읽어 말만 능할 뿐 사실 쓸 만한 인재는 아니었다. 한나라 문제가 가의를 등용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소견 있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선조의 마음을 미리 알았는지 《동호문답》에서는 선조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이 드러나 있습니다. 때로는 왕도정치를 이룰 수 있는 밝은 군주라 평하다가도, 또 한편에서는 신하들을 형식으로만 대할 뿐 진심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율곡은 출사와 퇴사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년에 선조는 율곡을 전폭적으로 신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율곡은 깊은 병이 들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율곡은 나이 50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1536~1584). 만시지탄(晩時之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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