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책을 덮고 며칠만 지나도 그 감흥을 그대로 옮겨적기 어렵습니다. 제가 아둔한 건지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김훈의 《남한산성》은 책을 덮은지 10여일이 지났지만 생동생동한 느낌이 그대로입니다. 되새길수록 오히려 더 깊게 다가옵니다.
이러한 느낌이 비단 저만의 느낌은 아닌가봅니다. 출간되자마자 김훈의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이 책은 벌써 대형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제 목 : 남한산성
지은이 : 김훈
펴낸곳 : 학고재 (초판 출간일 2007.4.14 / 초판 1쇄를 읽음) ₩11,000
《남한산성》은 읽는 내내 답답하였습니다. 책을 덮어도 답답하였습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들어가 47일간 농성한 기록인데, 성안의 모든 이들이 주인공입니다. 인조도, 김상헌도 최명길도 이시백도, 대장장이 서날쇠와 뱃사공의 딸 나루까지, 그리고 그 누구보다 답답했을 백성들까지, 이 책에 나오는 모든이들이 주인공이자, 고통받는 자들입니다. 한결같이 고통받고 있으니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할 수밖에요.
2004년에 출간된 김훈의 《자전거여행 2》에 남한산성 기행편이 있습니다. 스무 쪽도 안 되는 짧은 기행문 안에, 실은 《남한산성》에서 말하고자하는 대부분이 이미 담겨 있었습니다. 소설 《남한산성》은 이미 이때부터 씌어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남한산성 서문의 치욕과 고통을 성찰하는 일은,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세상에서 그러나 죽을 수 없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마도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은 없는 모양이다. 모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은 결국 받아들여진다. 삶으로부터 치욕을 제거할 수는 없다. 삶과 죽음이 서로를 겨누며 목통을 조일 때 삶이 치욕이고 죽음이 광휘인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이 세상에는 말하여질 있는 것보다도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은 모양이다. -《자전거여행 2》 p.181

《자전거여행 2》 남한산성 기행 첫머리에 써놓은 저 말이, 곧 소설 《남한산성》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한산성 서문은 인조가 세자를 이끌고 청태종에게 항복 의식을 하기 위해 나섰던 문입니다. 문앞은 가팔라서 쉽게 걸어갈 수 없는 길이지만, 정문인 남문으로 죄인은 드나들 수 없다는 청태종의 말에 복종하기 위해 그 길을 나선 것입니다.
도성을 적에게 내주고 산성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버티는 싸움의 방식은 약소국의 마지막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농성은 전투도 아니고 협상도 아니고 투항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 싸움은 버티기였다. 대책없는 견딤이었다. (…)
산성에 갇힌 47일 동안 조선 조정의 싸움은 거의 대부분이 언어를 통해 이루어졌다. (…)
가장 치열하고 참혹한 언어의 전쟁은 주전파와 주화파 간의 논쟁이었다. 그것이 농성 47일 동안에 남한산성에서 벌어졌던 싸움의 핵심부였다. 성 밖은 기마부대와 포병부대를 선봉으로 삼는 25만의 적병이 포위하고 있었다.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 -《자전거여행 2》 p.189.
주전파의 김상헌과 주화파의 최명길은, 그 목표가 서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직과 백성과 국토의 보존이라는 동일한 목표가 있었지만, 말은 화해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념에 투철했지만 끝없는 부딪침은 결국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성밖에서 청의 장수 용골대가 보기에, 남한산성 안의 조선 왕의 행동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싸우는 것도 아니고, 투항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성 안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죽을 길과 살길은 모두 성문 밖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가 싸우든, 나가 투항하든. 사는 것과 죽는 것, 충(忠)과 역(逆)은 쉽게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삶을 말하는 자가 곧 죽음을 말하는 자 같았고, 죽음을 말하는 자가 곧 삶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가 고뇌했고, 인조는 선택해야 했습니다.
상황은 이처럼 준엄한데 임금의 앞에서 바느질과 솥과 화덕과 뱅어젓을 논합니다. 가진 것은 적은데 관료와 병사와 백성들에게 어떻게 분배해야할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어전에서 논의됩니다. 우리 일상사가 그러하듯이.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 신들의 소견은 중요하지 않사옵니다. 전하께서 요리하신다면 어찌 길이 없겠나이까. 성지를 밝혀주소서.
비둘기들이 마른 흙을 파헤치며 퍼덕거렸다. 퍼덕이는 소리가 내행전까지 들렸다. 임금이 천천히 말했다.
– 칸이 여러 가지를 묻더구나. …… 나는 살고자 한다. 그것이 나의 뜻이다.
저는 답답하다 못해 끝내 눈물이 흘렀습니다.
김상헌이 말했다.
– 살고자 하시는 뜻은 거룩한 것이옵니다. 신들은 전하의 뜻에 따를 것이옵니다. 살고자 하실진대, 답서를 보내지 마옵소서.
임금이 한동안 김상헌을 바라보았다. 김상헌이 임금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임금이 말했다.
– 예판의 문장이 단정하고 우뚝하더구나. 답서를 지으면 어떻겠는가.
김상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아아, 전하, 신은 …….
– 말하라. 역적이 되기 두려운가.
– 전하, 어찌 …… 신은 죽음으로 …….
– 살려 하는데 왜 죽음을 입에 담는가.
살려 하는데 왜 죽음을 입에 담는가. 누군가가 살고자 하는 방식은 또 다른 이에게는 죽음의 길이 었으니, 삶을 얘기하라는데 죽음을 얘기하고, 죽음을 얘기하라는데 삶을 얘기하는 수밖에.
소설은 과거를 얘기하고 있는데 나의 마음이 포개어져 마치 나의 삶이고 나의 고민인 듯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인조인가, 김상헌인가, 최명길인가, 이시백인가, 아니면 뱃사공인가 이름없는 백성들인가. 인조의 모습만 해도 실패한 대통령, 실패한 CEO, 실패한 가장, 실패한 나를 겹쳐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실패란 말이 거북하다면 ‘실패한’을 ‘고뇌하는’으로 바꿔 읽을 수도 있습니다.
《칼의 노래》도 여러 독법이 있듯, 《남한산성》에도 여러 독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서로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