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18] 똘레랑스

[논어강독 6] 똘레랑스

‘똘레랑스’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이 소개되고부터였습니다. 이 책은 읽는 이에게 잔잔한 충격을 줍니다. 차분한 문체에는 23년 간의 망명 생활의 고뇌와 깨달음이 묻어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책만큼은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야기가 옆길로 조금 샜습니다만, 아무튼 이 책에는 그동안 우리에게 생소했던 똘레랑스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똘레랑스의 어원은 ‘견디다’ ‘참다’를 뜻하는 라틴어 ‘tolerare’에서 나왔습니다. 1572년 8월 24일 기독교 구교(가톨릭)와 신교(위그노)의 갈등에서 빚어진 성 바돌로매 축일의 대학살이 똘레랑스를 출현하게 한 가장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전해집니다. 파리에서만 3,000여명의 신교도가 구교도에 의해 희생되었고, 이후 악순환이 계속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지식인들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모아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일 것을 얘기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똘레랑스입니다. 똘레랑스를 우리말로 옮기기에 딱 맞는 표현을 찾기 힘듭니다. 우리말로 굳이 옮기자면 ‘관용’이되 매우 ‘적극적인 관용’이라고 함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화|和|의 입장이지 동|同|의 입장이 아니다. (반면) 소인은 동|同|의 입장이며 화|和|의 입장이 아니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자왈,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자로13-23>

여기서 화|和|를 프랑스의 똘레랑스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조화로운 상태’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대개 위 문장은 이런 식으로들 해석합니다.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동일하되 화목하지 못하다.”

이렇게 해석해도 됩니다만, 동양 특유의 대비법에 근거하여 풀이하는 것이 훨씬 명쾌합니다. <논어>에서는 대비의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어떤 단어에 대한 정의는 그 근원을 찾다 보면 무한반복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로 하나의 개념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 동양의 각 문헌에서는 주로 비유나 대비의 방법을 씁니다. <도덕경>과 <장자>가 주로 비유적인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논어>는 대비의 방법을 많이 씁니다. 여기서는 군자와 소인을 대비하여 그 둘의 근본적인 차이를 또한 화|和|와 동|同|의 대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화|和|와 동|同|의 차이에 대해서는 <좌전>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제나라 경공이 안자|晏子|에게 화|和|와 동|同|의 차이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안자는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화|和|는 고깃국을 끓이는 것과 같아서, 물, 불, 식초, 고기, 간장, 소금, 매실 등을 고루 넣어 끓여야 제 맛이 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또한 맑고 흐림, 크고 작음, 길고 짧음, 슬픔과 기쁨의 감정이 골고루 녹아 있는 음악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물로만 조미를 하면 누가 먹겠으며, 여러 악기가 모두 하나의 소리로만 연주한다면 누가 그것을 듣겠냐고 되묻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同|이라는 것입니다.

화|和|는 조화를 뜻합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우러져 조화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반면 동|同|은 완전히 같음을 뜻합니다. <논어>가 정치학이라고 했을 때, 이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동|同|은 무조건 같음을 요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가 정치를 하면 다양성을 인정하여 무조건적으로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은 반면, 소인이 정치를 하면 무조건 같은 것으로 요구하여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화는 똘레랑스요, 동은 전체주의입니다.
굳이 멀리 1572년 파리의 신·구교 충돌을 예로 들 것도 없이, 우리의 가까운 과거만 보더라도 이 말의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오로지 같음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군사독재, 전체주의, 극좌, 극우의 다른 이름입니다.

(내일, 드디어 마지막 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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