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강독 5] 옛것과 새로운 것
공자는 매우 박식했다고 합니다. 스스로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오로지 독학하여 당대 최고 석학의 경지에 오릅니다. 하기야 공자와 같은 신분에 마땅히 교육을 받을 만한 데도 없었습니다. 중국 특유의 과장이 섞이긴 했겠지만 그의 주위에 제자들이 3,000여 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공자에게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그만의 공부 비법이 있었던 건 아닐까요?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옛것을 좋아하여 애써 구하는 사람이다.”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자왈, 아비생이지지자, 호고민이구지자야. <술이7-19>
무언가 대단한 비법이 나올 것 같았는데, 공자는 옛것을 좋아하여 애써 구해 공부했다는 말로 대신합니다. 여기서 옛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오래된 고전|古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책으로, 또는 말로 전해지는 모든 것은 이미 옛것이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옛것과 옛것이 아닌 것의 구분이 모호해집니다. 과연 옛것이란 무엇일까요?
주자는 <대학|大學|> 서문에서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직역하자면 ‘가서 오지 않는 게 없다‘는 것이니, 지나간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일 겁니다. 원래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했던 솔로몬의 말이 우리에겐 더 익숙합니다. 여기서도 옛것과 현재의 것의 차이가 모호해집니다.
옛것과 지금의 것, 혹은 나중의 것을 나누는 기준은 시간입니다. 시간은 또 무엇일까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런 뚱딴지같은 질문이 바로 철학의 출발점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공자의 다음 말을 보면서 시간의 의미에 대해 한번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것을 데워서 새로운 것을 알 수 있으면, 스승이 될 만하다.”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위정2-11>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옛것을 연구해서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는 것’ 정도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이 말의 용법을 보면, 대개 옛것|古|을 익히는 것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즉 옛것을 제대로 알아야 새로운 무언가를 알 수 있으니, 옛것을 익히는 데 게을리 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은연중에 복고적인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그러나 앞에서 공자의 생애를 통해 이미 알 수 있듯이, 그는 언제나 현실 정치의 참여가 목적이었습니다. 옛것만을 반복하여 익히면서 그냥 앉아있질 않았습니다. 과거 찬란했던 주례|周禮|를 현세에서 구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고|古|보다는 신|新|에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옛것을 익히는 목적은 오로지 새로운 것을 아는 데 있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온|溫|은 데운다는 뜻입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을 따뜻하게 데우다 보면, 거기서 무왕불복|無往不復| 또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과거와 현재를 모두 통달한 사람이 되는데, 이런 사람이야말로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옛것과 새것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 모두가 하나의 통일된 것으로 인식해야 진정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해석하면, 옛것과 새것의 그 관계를 통찰할 수 있어야만 진정 ‘안다’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흔히들 나이가 들면 뇌세포가 죽어가므로 머리가 점점 나빠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살다보면 보더라도 스폰지처럼 다 흡수하는 청소년기의 왕성한 기억력이 점차 힘을 잃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머리가 나빠진다고 할 수 있을까요? 머리가 좋다, 나쁘다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저는 여기서도 핵심은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결국 그에 얽힌 ‘관계’를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사물 간의 관계를 훤히 꿰뚫어 보는 능력을 ‘통찰력’이라합니다. 지식과 경험이 쌓여야 통찰력이 생깁니다. 옛것을 볼 줄 아는 능력과 새것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에서, 그 둘 사이의 관계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생깁니다. 통찰력은 ‘과거와 현재를 자유로이 넘나듦’입니다. 고전을 공부하는 것도 결국은 옛것과 새로운 것의 관계를 알아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공자의 공부 비법,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 답이,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의 다산 정약용식 풀이에 있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 문장을 ‘스승이 될 만하다.’라고 해석하는데, 다산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이란 직책은 한번 해볼 만하다.”
위|爲|를 ‘삼다’가 아니라 ‘하다’라고 해석하고, 사|師|를 ‘스승’이 아니라 ‘스승 노릇’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선생의 역할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제자들에게 쉽게 풀어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은 차갑게 식어버린 옛것을 제자들이 먹기 쉽게 알맞게 데워서 전달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과거에 미처 알지 못한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것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다산은 아마 자신의 체험에 근거하여 이와 같이 해석한 것 같습니다.
다산의 풀이가 옳다면, 공자의 박학다식함의 비결은 바로, 스스로 공부한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 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배우고 익혀서 나누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내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