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 파일 <논어>
이제 드디어 <논어>를 들여다 볼 차례입니다.
삼황오제로부터 춘추전국시대까지의 역사 이야기, 그리고 공자 이야기. <논어>를 알기 위해 참으로 많은 길을 거쳐 왔습니다. 도대체 <논어>가 뭐길래 우린 이렇게까지 먼 길을 돌아왔을까요?
<논어>에 실린 공자의 사상은 대부분 14년 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대략 68세부터 73세까지의 4~5년에 걸친 말년의 생각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파란만장했던 그 때 그 시대와 공자의 생애를 전혀 모른 채 <논어>의 첫 장을 넘기면 피식 웃음부터 나올 것입니다. 허탈한 웃음 또는 비웃음이.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이 <논어>가 참으로 대단한 경전이라고 하여 무작정 그 첫 장을 들춰본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그러할 것입니다.

첫 장을 펼치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뜻을 같이 하는)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학이1-1>
이 편의 이름은 <학이|學而|> 편입니다.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배우고> 편입니다. ‘학이시습지 ……’의 첫 두 글자를 딴 것입니다. 2편의 제목은 <위정|爲政|> 편입니다. 우리말로 <정치를 하되> 편입니다. 이 장은 ‘자왈,위정이도,비여북신……’으로 시작하는데, ‘자왈’은 너무 많이 등장하는 말이어서 그 다음 두 글자를 따서 편명으로 삼은 것입니다. 최초에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성의 없어 보입니다.
내용도 그냥 보면 별 내용도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말이나 대화들이 체계도 없이 불쑥 튀어 나옵니다. 그 대화가 이루어진 상황이나 장소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어 후세 사람들에게 엄청난 숙제거리를 안겨주었습니다.
논어는 창작이 아니라 채록입니다. 공자가 직접 집필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기억을 되살려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도 그러하고, 불경도 그러합니다. 공자가 실제 했던 말조차 그가 처음 한 말이 아니라 그 당시 일상적으로 쓰이던 말을 되풀이했던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와 같은 말은 공자가 직접 지어냈다기보다는 이미 그 당시 교양 있는 사람들이 널리 썼던 말일 것입니다. 이것저것 섞어놓았으니 제대로 읽어봐도 제목을 짓기가 만만찮습니다. 각 편의 제목이 저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앞뒤 전후 사정에 대한 설명도 없이 뜬금없이 등장하는 공자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풀어 써야 합니다. 압축된 그 말 속에 담긴 뜻을 풀지 않고서는 그 진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한자|漢字|라는 것 자체가 그 글자 하나에 수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으니 더욱 해석이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당시에 인쇄술도 없었으니 그 글자를 죽간에다가 한 자 한 자 옮겨 적었을 것입니다. 최대한 글자 수를 줄이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생각을 압축하고, 말을 압축하고, 글까지 압축하여 담았으니, <논어>는 한마디로 압축 파일인 셈입니다.
그런데 더욱 문제는 그것이 2,500년 전의 압축 파일이라는 것입니다. 정성껏 압축을 풀었는데 원래의 글 자체가 이미 암호 수준입니다. 겨우겨우 해석을 해놓고 보면,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그 어감이 조금씩 다릅니다. <논어> 해설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조금 있다가 다루겠습니다만, 지금은 학습|學習|이라는 말로 묶어 사용하는 단어를 예전에는 학|學|과 습|習|의 용법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도 오늘날 쓰이는 의미와 조금 다릅니다. 인민|人民|이라는 말도, 인|人|과 민|民|의 의미를 달리 사용했습니다. 군자|君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예|禮|는 오늘날 말하는 예절|禮節|이라는 뜻과 무엇이 다른지……. 풀어 놓으니, 말은 되는 것 같은데 정작 진정한 뜻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고문|古文|의 해석 방법을 따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 책을 참조하여 가장 적합한 해석이라고 생각한 것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

그러나 합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고전을 읽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 바로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재단하지 않기’입니다. 사극을 보면 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이 등장합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우리 손으로 뽑지 않은 왕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면서 백성의 생사를 쥐락펴락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복장도 그렇습니다. 소매도, 바짓가랑이도 치렁치렁한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르고, 머리는 평생 자르지도 않고, 사시사철 갓을 쓰고 있습니다. 만약 아직도 절대 왕권을 행사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국민들이 들고 일어서서 그 시도를 막아낼 것입니다. 아직도 거추장스러운 옛 옷을 입고 학교에 다니거나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며칠을 못가서 그만 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 사람들을 모두 바보 같고 멍청한 사람이라도 매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시 그런 신분질서와 복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초기 주|周|나라의 문화로 돌아가자고 외쳤다고 해서, 그를 노예주 계급을 옹호하는 보수주의자라고 몰아칠 수는 없습니다. <논어>에서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항상 대비해서 설명한다고 해서, 이분법과 흑백론의 원조라고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그런 말을 한 진정한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먼저이고, 그것이 현재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거의 말들 속에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보편적인 그 무엇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고전을 읽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지금부터 <논어> 강독에 들어갑니다. 강독은 뜻을 밝히면서 읽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논어>의 전편을 순서대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각 편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 굳이 순서대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몇 개의 주제를 정하여, 그 주제에 해당되는 문장을 골라 읽고 그 뜻을 음미하는 시간을 마련해볼까 합니다.
그 첫 번째 주제가 ‘학습과 실천’입니다.
(내일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