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12] 날아가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철학은 ‘변화’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서양철학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철학은 변화무쌍한 현실에서 ‘영원한’ 그 무엇을 찾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변화하는 현실을 허무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우주의 영원한 그 무엇을 찾다가 자연 또는 본성(physis)을 탐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철학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밀레토스 학파는 우주를 이루는 본질적인 그 무엇을 찾았는데, 그것을 탈레스는 물,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했습니다. 반면 피타고라스 학파는 물질이 아니라 수|數|를 사유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이렇듯 초기 그리스 철학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영원한 그 무엇, 즉 영원한 ‘존재’를 찾았습니다. 이들에게 ‘변화’는 ‘무상함’ 그 자체일 뿐이었습니다. 변화에 대한 부정은 곧 ‘제논의 아포리아’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중에 제논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운동 그 자체를 의심했습니다. 이를 제논의 아포리아(aporia)라고 합니다. 아포리아는 그리스어로 ‘방법이 없다,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몇 개의 아포리아가 있는데, 그 중에 ‘날아가는 화살 아포리아’를 살펴보죠.
화살이 날아갑니다. 이건 엄연한 실재입니다. 그러나 제논의 눈에 이것은 모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화살이 날아가는 것을 관찰했다고 치자. 그러나 우리가 보는 그 찰나에 화살은 어느 지점에 정지해 있다. 따라서 화살이 날아가는 것은, 실은 모든 정지된 지점의 집합에 불과하다.

선뜻 이해가 되나요? 그의 논리에 의하면 아무리 감각적으로 분명하게 느끼는 운동이 있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움직이는 모든 것은 순간순간을 촬영한 사진의 연속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보이는 그대로 믿지 않고 깊게 사유한 그의 정신은 높이 평가할 수 있겠지만, 사유의 엄격한 논리에 오히려 현실을 묻어버리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모순이기 때문에 결국은 움직임(운동)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헤겔이 명쾌하게 정리했습니다.
“운동이란 한 장소에 있으면서 동시에 거기 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운동 속에 모순이 있다고 해서 운동하지 않는 게 아니라, 운동 그 자체가 현존하는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운동’을 ‘변화’라는 말로 바꾸어도 그 의미는 통합니다.

<주역>은 ‘변화’ 그 자체를 이야기합니다.

일음일양지위도 |一陰一陽之謂道|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한다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되는 이런 변화 그 자체를 도라 일컫는다고 씌어있습니다.
아래 문장은 우리가 흔히 ‘궁하면 통한다’는 말의 원형입니다.

역,궁즉변,변즉통,통즉구 |易窮則變變則通通則久|
역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변화에 통달하면 막힘이 없으므로 오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위 말들은 <주역> 십익 중의 하나인 <계사전>에 실린 글입니다. <계사전>은 <주역> 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즉 <주역> 연구 논문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계사전>의 모든 내용을 종합하면 ‘주역은 곧 변화’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변화 자체에 대한 인정 또는 변화에 대한 긍정, 저는 이것을 동양적 사고의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합니다.

<주역>은 주나라의 ‘역’입니다. 예전에는 <주역> 외에도 몇 가지 ‘역’이 있었지만, 현재 전해 내려오는 것은 <주역>밖에 없습니다.
역|易|이라는 글자는 일|日|과 물|勿|로 이루어져 있고, ‘쉽다’ ‘바뀌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易|이라는 글자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마뱀의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日은 도마뱀의 머리이고, 勿은 다리입니다. 도마뱀이 이리저리 쉽게 옮겨 다니므로 ‘쉽다’ 또는 ‘바뀌다’는 뜻이 생겼다고 합니다. 물론 추측입니다. 日을 해로 보고, 勿을 도마뱀 껍질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도마뱀 껍질이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모양입니다.
햇볕이 구름 사이로 비치는 모양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日이 해이고, 勿은 햇살이 비치는 모양입니다. 흐렸다가 개였다가 자주 반복되니까 ‘변하다’는 뜻이 생겼다고 합니다.
勿자는 원래 ‘깃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극의 전투 장면 중에 병졸들이 깃발을 들고 뛰어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그 깃발의 모양이 그려지나요? 옛날의 깃발은 끝이 세 쪽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 모양이 바로 勿의 모양입니다.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 거기서 ‘변하다’는 뜻이 파생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데, <주역>의 역|易|은 ‘변하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데는 이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변한다는 의미로 보자면 도마뱀보다 카멜레온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도마뱀과 카멜레온은 친척쯤 되는 것 같으니 그냥 이해하기 쉽게 <주역>의 역|易|자를 보면 카멜레온을 떠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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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주역>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주역>에 대한 이야기는 않고 주변 이야기만 한 듯합니다. 저의 <주역> 이해 능력이 다소 모자라는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주역>을 그 자체로 해석하는 우를 경계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입니다.
철학을 공부할 때 철학사를 무시한 채 철학자의 논리 그 자체만을 논박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탈레스는 우주의 원질|原質|을 물이라 했고 아낙시메데스는 공기라고 했는데, 이것만으로 그들의 사고 수준이 천박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들은 그 당시에 우주의 원질을 찾으려고 노력했는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화에서 로고스로, 변화하는 현실에서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찾고자 했던 시대적 흐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학 이론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철학을 철학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존하는 <주역> 그 자체를 직역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역>의 성립 과정을 도외시하면, 단순히 길흉을 점치는 점술서로 여기거나, 처음부터 아주 체계적이고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었던 신비스러운 책으로 여기게 됩니다. 마치 아주 먼 옛날 외계인이 미개한 지구인들에게 남기고 간 비서|秘書|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까지 <주역>의 성립 배경을 중심으로 알아보았습니다. 남은 시간에는 주역을 체계적이고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이론적인 근거인 태극과 음양, 삼재, 사상, 오행 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지금의 눈으로 <주역>을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하면서 이 연재를 맺고자 합니다. 고전을 읽는 가장 큰 목적은 무엇보다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찾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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