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10] 마음을 굶겨야 도가 보인다

요 며칠 바빠서 독서노트 보내길 또 건너뛰었습니다. 시간이 많다고 해서 많아진만큼 알차게 보낼 수 있는 건 아닌가 봅니다. 잠시 긴장의 끈을 놓고 휴식을 취한다고 생각하지만, 돌아서 보면 역시 아쉬운 것이 흘러간 시간입니다.
오늘부터는 마음을 다잡고 신체 리듬을 정상 궤도로 돌려놓아야겠습니다. 참고로 전 지금 휴가중입니다^^


서울사람 되기

얘기가 딱딱해진 것 같아 제 얘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구에서 살았습니다. 행동 반경은 집과 학교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처음 한 달 정도는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우리라는 것을 이미 알았고, 제 마음도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자 뜻하지 않는 큰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바로 경상도 사투리가 문제가 된 거죠. 누구든 경상도 사람들은 사투리를 쓰고, 표준말을 사용한다고 해도 억양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서울 사람들은 서울말을 쓴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TV 뉴스와 드라마를 통해 서울말을 듣기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배들에게 저의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는데, 이 선배들, 저의 심각한 고민에는 관심이 없고 키득키득 웃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상도에서 온 새내기가 자못 진지한 얼굴로 인생을 논하고 있으니 선배들 보기에 아마 웃겼겟죠. 그때서야 전 내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왔음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실감했다는 말입니다. 처음으로 서울이 낯설게 느껴진 겁니다. 이전에 있었던 공동체(대구)와 새 공동체(서울)의 경계를 확연히 느낄 수가 있었죠.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가서야 자신이 물속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의사소통에 장애가 생겼음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술 마시고 즐기는 자리라면 상관없지만, 앞으로도 진지하게 나의 삶과 철학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사투리가 장애가 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해도, 정작 듣는 이는 은연중에 나의 사투리로 인해 지방에서 올라온 촌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촌놈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은 없지만, 그것이 진지한 의사소통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당장 고쳐야겠다고 마음먹고 참 많이 노력했습니다. 서울 출신의 선배들과 동기들의 말을 귀담아 듣게 되었고, 내용뿐만 아니라 어휘와 억양까지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연습했습니다.
서울말도 아니고 경상도 사투리도 아닌 국적 불명의 언어를 쓰는 과도기를 지나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괄목할만한 발전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남쪽의 억양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가끔 제가 남쪽이 고향이라고 하면 전혀 뜻밖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의 ‘서울사람 되기’ 프로젝트는 성공했습니다. 최소한 언어에서만큼은요. 장자가 말한 ‘다른 풍속에 들어가서는 그곳의 규칙을 따르라’는 말을 실천한 셈이죠. 물론 그때는 장자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전혀 몰랐지만요.

마음을 굶겨야 도가 보인다

<장자>에서는 끊임없이 고정관념, 선입견을 깰 것을 우언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소요유>에 나오는 송나라 모자 장수 이야기를 한번 볼까요.

송나라 사람이 예식 때 쓰는 모자를 잔뜩 가지고 월나라에 팔러 갔습니다. 그러나 월나라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짧게 깎고 몸에는 문신을 해서 모자가 필요 없었습니다. <소요유>

송나라 사람 이야기는 앞에서도 자주 나왔죠. 늘 이름도 없이 그저 ‘송나라 사람’이라고만 나오고 하나같이 어리석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옛날 상나라 유민이 사는 나라여서 업신여겼기 때문이라고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장자도 송나라 사람입니다.

여하튼 이 송나라 사람이 월나라에 모자를 팔러 갔는데, 월나라는 원래 머리를 짧게 깎고 다니는 풍습이 있어 모자가 필요 없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저 송나라 사람의 어리석음을 알려주려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송나라 사람이 월나라에 무언가를 팔려고 한다면 먼저 월나라의 풍습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살던 송나라의 풍습만 알고 월나라도 송나라와 똑같겠거니 생각하고 그냥 갔던 거죠. 장자가 보기에 뭇사람들의 모습이 송나라의 이 모자 장수처럼 보였나 봅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 즉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도 있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입니다. 송나라 모자 장수가 송나라에만 있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월나라에 가서까지 송나라의 풍습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장자는 송나라 모자 장수가 가졌던 이런 마음을 ‘성심|成心|’이라고 명명합니다. ‘이루어진 마음’, 즉 이미 만들어진 마음, 굳어버린 마음을 뜻합니다. 이미 만들어져 굳은 것이니 요즘말로 선입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정관념이라고 할 수 있고, 어려운 말로 ‘고착된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장자는 ‘성심’이라는 새로운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우리에게 생긴 ‘굳은 마음|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떠받들면, 스승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렇게 되면 어찌 변화의 이치를 아는 현명한 사람들만이겠느냐, 우둔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지. 아직 이런 굳은 마음이 없는데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오늘 월나라를 향해 떠나 어제 그곳에 도착했다는 것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제물론>

좀 뜻이 헷갈립니다만, 풀이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에게 ‘굳은 마음’이 없을 때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굳은 마음’이 생긴 연후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굳은 마음’을 스승으로 떠받든다면 세상에 어느 누가 수승이 없겠냐고 말합니다. 우둔한 사람도 ‘굳은 마음’을 스승으로 떠받들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의 모습이 아니겠느냐는 말입니다.

‘굳은 마음’을 선입견이나 초자아로 본다면, 초자아 없이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죠. 그렇다면 옳고 그름을 따지는 행위가 우둔한 것이니 그러지 말라는 뜻일까요? 아마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선입견이 없다면 사람들은 아무런 판단을 못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선입견을 나 아닌 다른 사람, 여기가 아닌 다른 공동체에서 그대로 적용하는 데서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바로 소통의 장애가 오는 거죠.

너는 들어 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다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이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구소|九韶|의 음악을 연주해 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락>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늘리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는 것과 비슷한 비유인 것 같습니다. 새를 새처럼 대접하지 않고 국빈처럼 대접하니 얼마 안 가 죽을 수밖에요. 아무리 섹시한 절세 미녀라도 참새 근처로 다가가면 날아가 버리고, 물고기도 도망가 버립니다. 미녀의 기준은 그때그때 다르며, 특히 사람들의 미의 기준이 동물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국빈 대접하듯 새를 대접한들 새에게는 한줌의 보리 이삭만큼의 가치도 없습니다.

새의 입장에서 새를 보살피지 않고 사람의 마음으로 새를 대접한 이 사람은, 결국 ‘굳은 마음으로 스승을 삼은’ 꼴입니다. 굳은 마음으로 스승을 삼는 것을 누가 나무라겠습니까. 정말 귀빈 대접할 사람을 극진히 대접했다면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새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며, 내가 익히 몸담고 있던 이곳이 아니라, 새로운 저곳입니다. 낯선 곳에서는 기존의 ‘굳은 마음’을 버리지 않고서는 적응할 수가 없습니다. 소통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새가 다르듯이, ‘나’와 ‘너’도 다릅니다. 새를 보살필 때 새의 입장에서 보살피듯이, ‘너’와 이야기할 때는 ‘나’를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너’와 소통하기 위해 ‘나’를 버리는 것, 이것을 장자는 마음을 굶긴다는 뜻의 ‘심재|心齋|’라고 썼습니다.

안회가 말했습니다. “저로서는 이제 더 생각해 낼 도리가 없습니다. 부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공자가 말했습니다. “재|齋|하라. 기존의 마음을 그대로 붙들어 둔다면 쉽게 될 수 없다.”
“저는 가난하여 여러 달 동안 술도 못 마시고 양념한 음식도 못 먹었습니다. 이것을 재|齋|라고 할 수는 없나요?”
“그런 것은 ‘제사 때의 재|齋|’이지, 마음의 재|齋|가 아니다.”
안회가 말했습니다. “부디 ‘마음의 재’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道|는 오직 빈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우는 것을 곧 ‘마음의 재’라고 한다.” <인간세>

공자의 제자 안회와 공자가 나눈 대화입니다. 여기서도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려 ‘심재|心齋|’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재|齋|는 ‘재계하다’는 뜻입니다. 재계한다는 것은 제사를 지낼 때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목욕재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술이나 고기, 파, 마늘 등 자극성 있는 음식을 피하는 것을 말합니다. 늘 먹던 것도 이때만큼은 먹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장자는 도|道|는 비어있는|虛| 곳에만 있고, 이것이 바로 심재라고 말했습니다. 비어있기 위해 마음을 닦는 것,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을 좀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마음을 굶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을 굶겨야 남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먹을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이든, 우주 만물이 돌아가는 법칙이든, 그 무엇이든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받아먹는 것이 곧 소통이고, 우주 만물이 돌아가는 법칙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곧 도통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통을 위해서든 도통을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굳은 마음을 비워야하나 봅니다.

<장자>에서 심재|心齋|와 비슷한 뜻으로 쓰인 말 중에 ‘오상아|吾喪我|’, ‘좌망|坐忘|’이라는 말도 쓰이고 있습니다. ‘오상아’는 글자 그대로 나를 잃어버렸다는 뜻이고, ‘좌망’은 앉아서 잊어버렸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뜻이라 따로 예를 들지 않겠습니다.

(내일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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