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11] 도는 걸어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도|道|라는 말이 나왔으니 도에 대해 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노장사상뿐만 아니라 중국의 고전을 읽으면서 도|道|라는 글자를 만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공자 이래로 누구든 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어떤 의미로 썼는지를 풀어 설명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마도 조금씩 그 의미를 달리한 것 같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근현대 철학에서도 하나의 단어가 여러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실존’이라는 말도, 중세철학에서 사용했을 때와 헤겔, 키에르케고르, 사트트르 등이 썼을 때 그 의미가 조금씩 달랐습니다.

노장사상을 이야기할 때 도|道|를 빼놓고 이야기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노장사상의 원조인 노자의 <도덕경>의 첫머리가 바로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이라는 말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도덕경>은 도와 덕을 논했기 때문에 그리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흔히 도는 ‘완성된’ 그 무엇, ‘완전한’ 그 무엇, ‘변하지 않는’ 그 무엇, ‘초월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초월적인 지식을 얻는 학문을 형이상학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지금 도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이런 형이상학적인 도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다가와서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말하는 도가 바로 그런 뜻의 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가 씌어질 당시, 즉 전국시대로 돌아가 보면 오늘날과 같이 형이상학적 의미로 쓰인 게 아는 것 같습니다. 먼저 공자의 <논어>를 보면 이런 구절이 보입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조문도석사가의|朝楣夕死可矣|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있습니다. 왜 공자는 “나는 도를 들으면 바로 죽어도 좋다”라고 하지 않고, 아침에 들었는데 굳이 저녁이 되어서야 죽어도 좋다고 했을까요? 아침과 저녁이라는 글자는 별 의미가 없는 글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고대의 여러 문헌에서 도는 ‘길’이라는 의미로 주로 쓰였습니다. 글자를 뜯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도|道|라는 글자의 옛날 글자는 행|行|과 수|首|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생각하며 걸어감’ 정도의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길’이든 ‘생각하며 걸어감’이든 모두 실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머릿속에만 있는 ‘지식’ 차원의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우쳤지만, 그건 머리로만 안 것이고, 실천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실천해보지 않고서 어찌 도를 깨우쳤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에서 자연철학이 발생할 즈음 중국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제자백가들의 ‘정치철학’이 발전했듯이, 서양에서 형이상학적 진리에 목을 매는 동안 중국 철학은 늘 언행일치|言行一致|,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습니다. 장자의 다음 말을 들으면 확실이 도가 실천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도|道|는 걸어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고, 사물은 우리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어찌해서 그렇게 되었는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어찌해서 그렇지 않게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제물론>

여기서 도는 확실하게 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도 그 자체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도라는 것을 알기 쉽게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장자는 공자가 말한 도라는 개념을 한층 발전시켰습니다. 공자에게 도는 언제나 주나라의 예, 즉 주례|周禮|를 뜻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인이 만든 길|道|이었고 그것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고민은 여기서 더 나아갔습니다. 주나라의 예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결국 그것은 이전의 성인이 걸어갔던 길이 아니었는가! 전설에 의하면 신농이 몸소 산천의 풀을 모두 뜯어 먹어보고 약초와 독초를 구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만든 지식과 지혜의 산물이 바로 도가 아니겠습니까.
장자는 도라는 것도 결국은 이렇게 앞선 사람들의 실천을 통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는 걸어다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원문을 보면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장자는 도라는 글자보다 행|行|이라는 글자에 주목했습니다. ‘만들어진 도’가 아니라 ‘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