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13] 지워진 고자의 말 채워 넣기(2)

순자의 주장이 고자의 주장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둘은 다릅니다. 맹자가 말한 선|善|이나 순자가 말한 ‘거칠고 조야함|惡|’은 모두 인간의 가치 평가가 들어 있는 말들입니다. 반면 고자의 말에는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맹자가 “그러면 개의 본성이 소의 본성이고, 소의 본성이 사람의 본성이란 말이냐?”라고 말했을 때는, 이미 개나 소보다 사람의 본성이 훨씬 우월하고 좋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자의 말에는 처음부터 본성에 대한 가치 평가가 없습니다. 고자가 보기에 인간의 본성은 동물적 욕구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적 욕구라고 해도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물론 ‘좋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할 뿐이었습니다. “에라, 이 개보다 못한 놈아!”라고 하면 개라는 동물은 사람보다 저급하고, 심지어 나쁘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고자는 그것을 부정합니다. 고자가 보기에는 개의 본성이나 소의 본성, 심지어 인간의 본성이 모두 동일합니다. 삶에 대한 원초적 욕구, 그것만이 유일할 뿐입니다.

맹자는 인간이 원래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속에 살면서 만들어진 가치 덕목들을 본성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가치 덕목들을 절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수많은 가치 덕목들 중에서 유독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등만을 본성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사회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를, 인간의 타고난 본성, 즉 인간이 어질고 의로울 수밖에 없는 ‘원인’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결국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사회를 이루고 살지 않으면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인 이상 특정 사회에 소속되어 있고, 그 안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철저하게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한 맹자의 주장이 타당한 것일까요? 개나 소나 인간이나 본성이 모두 같다고 말한 고자는 과연 인간의 사회성마저 부정한 것일까요?
고자의 말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의 고자의 말만으로도 그는 인간의 사회성 자체를 부정했다는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는 사회성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선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날 때부터 타고난, 즉 철학에서 말하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사회화 과정을 거친 후에 평가할 수 있는 사후적인 개념이라는 뜻입니다.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것이죠.

실제 고자는 인간의 본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 본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본성에 대한 논의 그 자체가 의미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맹자가 인간이 원래 선하다고 한 말은 교육의 결과를 두고 타고난 본성이라 말하는 것이니 본말이 전도된 것일 뿐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의도’가 들어 있는 주장임을 간파한 것입니다.

그 의도는 다름 아닌 왕도정치|王道政治|입니다.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이니, 굳이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아도 선한 본성을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군주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군주 역시 인간이므로 선한 존재인데, 그렇지 않은 군주를 바꿀 수 있다는 혁명론으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맹자가 목에 힘을 주고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한 것은 결국 맹자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나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맹자의 성선설은 결국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입니다. 범가가 법치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본성론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됩니다.
좀 더 예를 들어보죠. 우리는 앞서 맹자의 사단|四端|을 살펴봤습니다. 그 중에서 사양지심은 예|禮|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맹자의 논리대로라면 인간은 본래부터 선하기 때문에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을 가지고 있고, 이로부터 예|禮|가 생겨난 것입니다. 예|禮|는 곧 인간의 본성에서 발현된 것이니 예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예의’, ‘예절’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곧 규범입니다. 고대에 예|禮|는 곧 ‘사회 규범’입니다. 결국 인간 본성이 사회화되어 나타나는 예|禮|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선설은 순수하고 사변적인 이론이 아니라 다분히 윤리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입니다.

자, 그럼, 맹자의 결론으로 끝난 성선설 대화에서 지워진 고자의 마지막 말을 채워 넣겠습니다. 제가 제 식대로 채워 넣듯이 여러분도 한번 마음껏 채워 넣어 보세요.

#1 버드나무 논쟁

고자 : 본성은 버드나무와 같습니다. 외로움은 버드나무로 만든 나무술잔과 같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어질고 의롭다고 하는 것은 마치 버드나무를 나무술잔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맹자 : 당신은 버드나무의 본성을 따라서 나무술잔을 만든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버드나무의 본성을 해쳐서 나무술잔을 만든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버드나무의 본성을 해쳐서 나무술잔을 만든다고 본다면 또한 사람의 본성을 해쳐서 어질고 의롭게 된다고 보는 겁니까? 천하 사람들을 이끌고서 어짊과 의로움을 해치는 것이 분명 그대의 말일 것입니다.

(고자 : 그렇다면 나무술잔에 남아있는 버드나무의 본성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나무술잔이 과거에 버드나무였다는 것밖에 없는데요. 또한 만약 버드나무의 나무술잔이 사람에게 인의|仁義|에 해당된다면, 버드나무로 만든 나무 몽둥이는 사람에게 무엇에 해당되는지요?)

#2 소용돌이치는 물 논쟁

고자 : 본성은 소용돌이치는 물과도 같아서, 동쪽으로 터주면 동쪽으로 흘러가고, 서쪽으로 터주면 서쪽으로 흘러갑니다. 사람의 본성에 선과 불선의 구분이 없는 것은 물에 동과 서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맹자 : 물에 진정 동서의 구분은 없지만 위아래의 구분도 없겠습니까?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선하지 않음이 없고, 물은 아래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지금 물을 쳐서 튀게 하면 이마를 지나가게 할 수 있고, 세차게 밀어 보내면 산 위에도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습니까? 그 형세가 그런 것일 뿐입니다. 사람을 선하지 않게 할 수도 있지만, 그 본성은 또한 이와 같을 뿐입니다.

(고자 :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이 물의 본성이라 했는데, 돌멩이도 아래로 구르고, 낙엽도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럼 물과 돌멩이와 낙엽의 본성이 모두 같다는 말씀이죠?)

#3 개와 소의 본성

고자 : 태어난 그대로를 본성이라고 합니다.

맹자 : 태어난 그대로를 본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흰 것을 희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까?

고자 : 그렇습니다.

맹자 : 흰 깃털이 흰 것은 흰 눈이 흰 것과 같고, 흰 눈이 흰 것은 흰 옥이 흰 것과 같은 것입니까?

고자 : 그렇습니다.

맹자 : 그렇다면 개의 본성이 소의 본성과 같고, 소의 본성은 사람의 본성과 같은 것입니까?

(고자 : 만약 개와 소와 반드시 구분되는 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인간 중에도 선하고 악한 사람이 있는데, 악한 사람은 인간이 아니란 말씀인가요? 어떤 사람은 선할 때도 있고 악할 때도 있는데, 그렇다면 선할 때는 인간이고 악한 마음을 가졌을 때는 인간이 아닌가요? 그럼 뭔가요?

맹자 :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지요.

고자 : 동물도 자기 새끼를 아끼는 마음이 지극합니다. 자기를 돌봐주던 주인이 죽으면 소가 눈물을 흘린다는데, 그럼 이 때 소는 소의 탈을 쓴 인간인가요?
맹자 : 소는 소일뿐입니다. 소가 눈물을 흘린다고 소의 본성이 선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가끔 그럴 수 있으나 본바탕은 동물적인 욕구밖에 없지요. 반면 인간은 본바탕이 선하기 때문에 대개 선해지려고 하지만 군주가 힘으로 정치를 하여 힘이 최고인 줄 알게된 것입니다.

고자 : 인간이 선하게 되는 것이 타고난 본바탕 때문이라면, 인간이 악하게 되는 것 역시 타고난 본바탕이 악해서가 아닌가요?

– 고자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자 화가 나서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ㅎㅎ 좀 심했나요^^

(내일 맹자 마직막 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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