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03] 맹자의 부활

이번 한 주는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한 주 내내 새벽까지 술이 이어졌습니다.
체력이 바닥이 났습니다. 주말에 좀 회복을 해야겠습니다.

오늘 월드컵 스위스전은 아쉬움을 많이 남기는 경기였습니다.
답답하고 속상하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평상심을 되찾아야겠습니다.

맹자의 부활

전국시대는 진시황에 의해 마감됩니다. 진시황이 죽자 잠시간의 혼란기를 거쳐 다시 유방의 한나라가 중원을 통일합니다. 한나라 멸망 후 300년이 넘는 혼란기를 거쳐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합니다. 그것도 잠시, 이내 당나라에 천하를 내주게 됩니다. 이때, 삼장법사로 널리 알려진 현장이 천축국에서 600권이나 되는 불경을 가져옵니다. 천축은 지금의 인도에 해당됩니다. 현장의 불경 도입은 이미 당시에 불교가 꽤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방증입니다.

잠자던 맹자가 부활한 것은 바로 이 때입니다. 불교가 광범위하게 퍼지자, 그동안 유가의 정통에 대해 상이한 평가를 내리던 학자들이 위기의식을 느껴 단결하게 됩니다. 맹자 부활의 일등 공신은 바로 한유|韓愈|. 그는 공자·맹자로 이어지는 도통설|道統說|을 주장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자의 사상이 증자와 자사를 거쳐 맹자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 맹자는 순자와 더불어 여러 학자 중의 하나에 불과했었는데, 공자를 계승한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도통설의 핵심은 유학이라는 도|道|는 불교가 있기 전에 이미 공자와 맹자라는 성인에 의해 계승되어 지금에 이르렀다는 주장입니다. 누가 예상을 했겠습니까? 맹자가 그토록 공격했던 양주학파나 묵가가 아니라, 생전에 전혀 들어보지 못한 불교와 싸우기 위해 그를 살려냈으니. 그것도 세상을 떠난 지 1,200년이나 후에 말입니다.

그 후 송나라 때, 주자|朱子|로 잘 알려진 주희|朱熹|가 <논어>,<맹자>,<대학>,<중용>을 사서로 확정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사서는 과거 시험을 위한 필독서가 되었고, 맹자는 공자와 더불어 명실상부 유교의 공동 대표가 되었습니다. 공동 대표를 함께 부르기 쉽게 줄여서 공맹|孔孟|이라고도 합니다.

그 후에 원나라 문종은 맹자를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이라고 불렀습니다. 추나라의 아성|亞聖|이라는 뜻입니다. 전사한 군인에게 사후에 훈장을 추서하듯, 명나라와 청나라 때도 맹자에 대한 추가 관직은 계속됐습니다. 살아서 무시하더니 죽어서 등용한 셈입니다.

<맹자> 읽는 법

고전을 읽을 때 끝까지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왜 읽느냐는 목적의식입니다. 순전히 재미로만 읽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재미로 말하자면 만화나 소설보다 못하고, 실용적인 것으로 따지면야 처세와 학습서보다 못합니다.

고전은 오래된 서적입니다. 오래 전에 기록된 것을 지금 다시 보는 것입니다. 오래된 기록이기는 하지만 당대에는 최신판 도서였을 것입니다. 다만 보는 시점이 오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전은 역사서와 비슷합니다. 과거라고 불리는 ‘지난 현실’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당대의 문제의식을 읽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기서만 그쳐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고증은 그것을 업으로 하는 학자의 몫일 뿐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를 둘러보았으면, 그것을 통해 오늘과 내일을 보는 눈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대개 눈은 밖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 즉 현재와 미래를 생각한다고 하면 으레 정치나 경제, 사회 문제를 떠올립니다. 거기에 더해서, 내면을 바라보는 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몸과 마음을 닦는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품성과 지혜를 닦는다고도 합니다. 수양이라는 표현도 씁니다.
나를 돌아보고 현재의 사회를 돌아보는 눈,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지혜와 힘, 고전 읽기를 통해 바로 이런 것들을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고전 읽기는 오래된 글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다른 책들을 읽는 것과 그 목적이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맹자> 읽기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읽는 이에 따라 그 중점을 두는 바가 다를 수 있습니다. 내면의 수양 차원에서 볼 수도 있고, 철학적․사상적·정치적 의미에 중점을 두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가급적 모든 면을 두루 다루되 두 가지 방향으로 읽을 예정입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방향, 즉 <맹자>에 담긴 뜻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최대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읽겠습니다. 전반부가 이에 해당됩니다. 왕도정치와 인정|仁政|에 담긴 백성을 아끼는 민본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주로 보겠습니다. 이와 반대로 후반부에는 비판적 읽기를 시도하겠습니다. 민본주의를 외치면서도 결국은 통치 자체는 도덕적으로 백성들보다 우월한 ‘군자’에게 맡겨야 하고, 귀한 지식인과 천한 백성 간의 근본적 차이를 정당화하고 오히려 고착화하는 점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 본성론의 한계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읽는 것은 삐딱하게 본다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비판은 비판적 수용을 위한 노력입니다. 현실을 보는 눈을 키우고 판단하는 능력을 갖추는 과정입니다. 반면 삐딱하게 읽는 것은 행간의 의미조차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것 없이 오로지 내치기만 하는 거부감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삐딱하게 읽는 것과 같습니다. 비판은 받아들이기 위한 긍정적인 사고의 투쟁 과정입니다.

(내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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