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04] 임금을 죽인 게 아니라 필부를 죽인 것이다

임금을 죽인 게 아니라 필부를 죽인 것이다

대개의 중국 철학서를 보면 맹자의 사상은 전국시대 걸맞지 않게 우원하여 채택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원하다는 말은 길이 구불구불하게 굽이져서 돌아서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원하다는 말은 달리 보면 급진적이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비현실적인 것이 오히려 급진적입니다. 이상적인 것은 현실에서 수용되기 힘듭니다. 따라서 이상적인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면, 그것이 곧 급진적인 것이 됩니다.
제가 보기에 맹자의 사상은 우원하기보다는 오히려 매우 급진적이었습니다. 다음 예를 한번 볼까요.

제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탕 임금이 걸|桀| 임금을 쫓아내고 무왕이 주|紂| 임금을 정벌한 일이 있었습니까?”
누구나 아는 매우 당연한 이야기를 묻습니다. 하나라의 폭군 걸, 상나라의 폭군 주에 대해서는 우리도 앞서 살펴봤습니다. 박학다식했던 맹자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옛날 책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선왕이 다시 묻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일 수 있는 것입니까?”
선왕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폭군 걸과 주의 행태를. 그러나 차마 신하가 왕을 죽일 수 있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왕이니까요.
맹자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인|仁|을 파괴하는 사람은 도적이고, 의|義|를 파괴하는 사람은 강도입니다. 도적이나 강도는 일개 필부|匹夫|입니다. 필부 하나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거침이 없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차마 죽일 수 없으니, 그 죽임을 당한 자는 임금이 아니라 필부에 불과했다는 논리입니다. 왕 앞에서, 인의|仁義|가 없다면 왕이 아니라 필부에 불과하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의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약과에 불과합니다. 지나간 일에 대해 말한 것일 뿐입니다.

선왕이 한번은 재상의 역할에 대해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옛일이 아니라 지금의 왕과 신하의 관계에 대해 물었던 것입니다.
맹자가 대답합니다.
“왕께서는 어떤 재상을 물으십니까?”
“재상에 무슨 구분이 있습니까?”
“네, 같은 혈족의 재상이 있고 다른 혈족의 재상이 있습니다.”
“그럼 같은 혈족의 재상에 대해 먼저 알려주시지요.”
같은 혈족이라 함은 성씨가 같은 신하, 즉 왕가의 신하들을 말합니다.
이에 맹자가 대답합니다.
“군주가 큰 잘못이 있으면 비판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것을 되풀이하여도 듣지 않으면 그를 버리고 다른 이를 군주로 세웁니다.”
참으로 의연합니다. 거리낌이 없습니다. 올차고 당돌하기까지 합니다. 상대는 이웃집 아저씨가 아니라 당대 최강국인 제나라의 국왕입니다. 그런 왕 앞에서, 왕이 잘못이 있는데 신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신하는 현재의 왕을 버리고 다른 왕을 새로 세울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선왕의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평정을 찾습니다. 맹자도 대단하지만 선왕 또한 훌륭합니다. 속 좁은 왕 같았으면 당장 맹자의 목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다른 혈족의 재상에 대해 묻습니다. 맹자가 다시 대답합니다.
“군주가 잘못하면 비판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것을 되풀이하여도 듣지 않으면 그 나라를 떠납니다.”
같은 성씨의 신하는 결국 왕족이니, 같은 왕족 내에서 다른 왕으로 갈아치우면 되겠지만, 다른 혈족은 차마 그럴 수 없어 아예 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망명한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이 상황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지금이야 한 나라의 대통령을 술자리 안주삼아 얘기하고 공개적으로 비판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럴 수 있게 된 것도 불과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불과 수십 년 전, 정당한 비판조차 총칼로 되돌아오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절대 왕권을 가졌던 2,000년 전 전국시대의 일이야 말한들 무엇 하겠습니까? 절대 권위를 부정했던 맹자의 의연함. 위풍당당함, <맹자>를 읽는 묘미는 바로 이런 데 있습니다.

<논어>에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을 ‘신|臣|’과 ‘자|子|’에 중점을 두고 말합니다. 신하와 자식 된 도리만 강조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군|君|’과 ‘부|父|’에 중점을 두면 어떨까요? 임금이 임금 역할은 못하면 임금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버지 역할을 못하면 아버지가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던 뜻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여민동락|與民同樂|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생각은 군주에게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요구합니다.
하루는 맹자가 양혜왕을 찾아갔는데, 왕이 연못가에서 고니와 사슴 등 갖가지 새와 짐승를 보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현자|賢者|들도 이런 것을 즐깁니까?”
맹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현자라야만 이런 것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현자가 아니면 비록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즐길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직 불분명하지요? 맹자의 부연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문왕은 백성들의 노역으로 대를 세우고 못을 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모두 그것을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했으며, 그 대를 영대라 하고, 그 못을 영소라고 부르면서 그곳에서 사슴과 물고기와 자라들이 살고 있음을 즐거워했습니다. 이와 같이 옛사람들은 그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했기 때문에 제대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라의 폭군 걸왕은 이와 반대의 경우입니다.) ≪서경≫ <탕서>에 (백성들이 걸왕을 저주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저놈의 해 언제나 없어지려나 / 내 차라리 저놈의 해와 함께 죽어버렸으면’
만약 백성들이 그와 함께 죽어 없어지기를 바랄 지경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대와 못, 아름다운 새와 짐승들이 있다고 한들 어찌 혼자서 그것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양혜왕 上>

백성들과 즐거움을 나누지 못하고, 홀로 즐거움을 구한다면 먼 옛날 하나라의 폭군 걸왕이 그러했듯이 백성들은 왕이 사라지기를 노래할 것이고, 결국 하늘은 그 왕을 갈아치운다는 경고의 뜻이기도 합니다.
1980년대 대학가에서 유행한 노래 중에 ‘함께하는 세상’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가사는 이러합니다.

물에 빠져버린 돈 없는 자 당신은 건질 줄 아오.
오다가다 만난 그 사람의 슬픔을 당신은 아오.
지나칠 수 없는 그 고통을 어이해 피해 가려오.
혼자 살려하는 그런 세상은 어디에도 없구려.
☞ 노래 직접 듣기

이것이 1절입니다. 혼자 살려하는 그런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는 말은 맹자가 말한 ‘여민동락’의 의미와 같습니다. 만약 군주가 그러하지 못하다면?
다음은 이 노래의 3절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세상 그 누가 막으려 하오.
억압 탄압하는 저들의 세상 정말 살기 힘드오.
지나칠 수 없는 우리의 세상 우리가 뭉쳐야 하오.
함께 살아가는 즐거운 세상 어디에나 있구려.

여민동락하지 않는 세상을 위 노래는 ‘저들의 세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억압·탄압하는 현실을 뒤엎겠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내 차라리 저놈의 해와 함께 죽어버렸으면’하는 ≪서경≫의 노래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서경≫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기록입니다. 수천 년 전의 기록입니다. 그 때의 민심이나 지금의 민심이나 크게 다를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내일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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