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강독 4] 공자의 정치학
지금까지 <논어>에 나타난 배움과 앎이라는 주제를 다뤘습니다. 이번에 다룰 주제는 공자의 ‘정치학’입니다. 왜 뜬금없이 정치학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공자의 학문은 그 자체가 이미 처음부터 정치학이었습니다.
서양 철학, 정확하게 말하면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철학은, 그 시초가 자연철학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은, 사람을 포함한 세상 그 자체를 말합니다. 자연철학의 특징은 ‘영원한 그 무엇’을 찾는 데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 그러니까 기원전 7세기 경에는 전쟁이 잦았습니다. 이 때 문학적으로 서정시가 유행했는데, 시의 주제는 천편일률적으로 허무와 죽음, 고독, 그리고 전쟁에서 피어난 사랑 따위였습니다. 일을 하다가도 전쟁이 나면 바로 소집되어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즐거움보다는 슬픔이 지배했던 시대였습니다. 철학이 탄생한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인생의 허무를 극복을 위해 변하지 않는, ‘영원한 그 무엇’을 찾기 위한 사색이 바로 철학이었습니다.
반면 동양철학이라고 일컫는 공자와 맹자, 순자, 노자, 묵자, 한비자의 철학은 사실 순수학문을 의미하는 철학이 아닙니다. 영원 그 무엇을 찾아 체계적으로 사색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양의 사상은 처음부터 정치학에 가깝습니다. 공자가 평생을 돌아다니며 각국의 왕들을 만난 것은 스스로 대부의 위치에 올라 이상적인 정치를 펼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맹자의 왕도정치, 순자의 예치주의, 묵자의 겸애설에 바탕을 둔 현인정치, 한비자의 법치주의 등은 모두 정치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양의 사상은 난세를 극복하여 치세|治世|를 이루려는 관심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자가 생각한 정치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정령으로써 이끌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면하기만 할 뿐이요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나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다스리면 사람들은 부끄러워하여 장차 바르게 된다.”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위정2-3>
유가의 덕치주의|德治主義|와 법가의 |法治主義|를 대비시키는 유명한 문장입니다. 정|政|은 정령이라고 풀어봤습니다. 명령이나 법률을 말합니다. 먼저 앞 문장은 법치주의의 폐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명령을 하거나 법으로써만 이끌다가 만약 그것을 어겨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그 형벌을 피하려고만 할 것이고, 혹시 형벌을 받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통법규를 어겨서 걸리면 대개는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벌금 내는 돈을 아까워하는 마음뿐입니다. 비자금을 조성하여 불법적으로 유용하다 적발되어도 진실로 부끄러워하는 정치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반면 덕으로써 다스리면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여 결국은 스스로 바로잡게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어지러운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것은 법가사상으로 무장한 진나라였습니다. 당시 재상은 상앙|商鞅|이었는데, 강력한 법치로 진제국의 통일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이 죽자 그의 잔혹한 정치에 원한을 품은 반대파에 의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집니다. 진나라는 30년을 못가 망하고 맙니다. 그 후에 중국은 한|漢|에 의해 다시 통일됩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들어 법가의 법치주의 한계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역사 전체를 놓고 보자면, 진과 한은 중국에서 통일제국이 완성되어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이 통일제국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면, 한은 이를 계승하여 지켜가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라를 일으킬 때는 힘을 강력하게 결집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어 법가가 유용했지만, 나라가 안정되면서 더 이상 강력한 법과 무력만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한계에 부딪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들 흔히, 덕치는 평화로운 시대 즉, 치세의 학이라 하고, 법치는 어지러운 격변기, 즉 난세의 학이라고 합니다.
다시 원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다스리면 사람들은 부끄러워하여 장차 바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덕치의 목적은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언제 생길까요?
저는 가끔 투명인간이 되는 상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디 도깨비 감투가 생겨 내 몸이 보이지 않는다면 …….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털어서 가난한 사람 집에 몰래 주고 와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대개가 평소에 눈치가 보여 못하던 일들을 벌이거나, 아니면 입가에 살며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요리조리 못된 짓을 골라할 생각을 할 것입니다. 투명인간이 되면 ‘부끄러워하는 마음 제로(0)’인 상태가 됩니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어지는 것은, 나를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나와 남을 이어주는 고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의 관계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몇 년 동안 군대에 가 있어도 오매불망 생각나는 애인은 나와 가장 밀접한 관계의 사람이기 때문이며, 만원 지하철 안에서 서로 몸을 바짝 붙이고 얼굴을 맞대고 있어도, 바로 앞의 그 사람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건 나와 그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별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바로 이 관계의 지속입니다.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될 때만 사회는 유지되고 질서가 생겨납니다. 횡단보도가 아닌 차도를 그냥 건너는 것도 남이 볼까 부끄럽고, 휴지를 길거리에 그냥 버리는 것도 부끄러워 그러지 못합니다. 길거리에 노상 방뇨할 수 없는 것은 부끄러워 그러지 못하는 것이며, 술 취하여 과감하게 담벼락에 쉬~하는 것은 술이 부끄러움을 마비시켰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바로 이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라야 스스로 바로 서는 사회라고 믿었습니다. 덕치가 정말 현실성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와는 별개로, 우리는 법치보다는 덕치에 더욱 애정이 끌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덕으로써 인간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반면, 강력한 법만으로 그 질서를 바로잡을 수도 없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2,500년이 지났지만, 공자의 정치학이 여전히 그 호소력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