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강독 3]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결국 공자에게 ‘아는 것’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은 공자의 관심 밖입니다. 공자의 관심은 오로지 아는 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니,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는 앎이란 결국 모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주제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으로 잡았습니다.
‘앎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역시 공자는 소크라테스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야기는 조금 더 있다가 하겠습니다.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자왈,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옹야6-18>
매우 익숙한 문장입니다. 문장도 어렵지 않으니, 이런 정도는 원문 그대로 외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평범한 문장 같지만, ‘앎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습니다.
중요한 글자가 세 개 있습니다. 먼저 지|知|는 ‘안다’는 뜻인데, 문맥상으로 보면 뒤에 나오는 호|好|와 낙|樂|에 비해서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아주 낮은 단계의 ‘앎’의 상태인 것 같습니다. 다음은 호|好|, 좋아한다는 뜻인데, 단순히 아는 것에서 한 차원 높은 단계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낙|樂|, 좋아하는 것을 초월해서 즐거움의 경지에 다다른 상태입니다. 대개는 아는 것과,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의 차이를 말하면서 이 문장을 해석하고 끝냅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너무 표면적인 해석인 것 같습니다.
지|知|와 호|好|, 낙|樂|을 별개의 것으로 여겨서는 해석이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지|知|의 발전 단계로 봐야 옳습니다. 즉, 지|知|는 우리가 통상 ‘안다’라고 하는 단계입니다. 집 나갈 때 어머니께서, “얘야, 차 조심해라.”라고 하면, 우리는 그냥 알았다는 듯이 “네, 어머니”합니다. 어머니의 말뜻이 무엇인지는 알았다는 뜻이니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밖을 나가면 이내 어머니의 말씀을 잊어버립니다. 습관적으로 “네”라고 대답했을 뿐입니다. 집밖에 나가서 어머니의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단계가 아마 호|好|의 단계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정말 교통사고의 경험이 있었다면 그는 본능적으로 거리의 차를 경계할 것입니다. 이것이 낙|樂|의 경지가 아닐까요. 공부를 예로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이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공부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 열심히 해두는 게 평생 밑천이 된다.” 학생들에게 이런 얘길 하는데 대개의 경우 건성으로 “네.”하고 맙니다.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니 그냥 “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공부를 좋아하는 단계, 나아가 공부 그 자체가 즐거운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조금 전의 어른의 말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공자는 그냥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는 지식은 진정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점에서 소크라테스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공자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외쳤다면, 소크라테스는 지덕합일|知德合一|을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덕은 도덕, 또는 영혼, 행복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영혼이 일치한다는 것인데, 대개의 경우 아는 것과 영혼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원래는 일치하지 않는데 일치시키도록 ‘해야 한다’는 당위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죠.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은, 영혼이 변하지 않은 상태는 진정으로 아는 상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전쟁의 고통을 안다고 말할 때, 6․25와 같은 전쟁의 끔찍함을 직접 겪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두 말은 천양지차일 것입니다.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정말 전쟁의 고통을 알까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영혼의 변화는 곧 영혼의 변화로 인한 행동의 변화까지를 말합니다. ‘앎과 실천의 통일’을 말한 공자의 그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그런 지식을 전달해 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사람이 스스로 행동하도록 무지를 깨우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지식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의 행동을 변화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지구 반대편에 먼저 살다 간 공자와 쌍둥이처럼 닮았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