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14] 앎이란 무엇인가?

[논어강독 2] 앎이란 무엇인가?

아는 것은 과연 무엇이고, 알아가는 과정은 어떠한지에 대해 따지고 드는 학문을 ‘인식론’이라고 합니다. 인식론은 서양 철학의 일부이자 매우 중요한 분야입니다.
그러나 <논어>는 철학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철학’이라고 부르는 이 학문은 그리스에서 비롯된 사유 방법이자 학문입니다. 이미 잘 알다시피, 철학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했으며, 필로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라는 뜻의 접두사이고, 소피아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즉 ‘애지(愛知)의 학문’이 곧 필로소피아입니다. 철학은 필로소피아의 번역어입니다. 그리스적인 의미의 철학은 동양에 없습니다. 다만 오늘날 철학이라는 학문에 비추어 동양의 전통 문화와 사상을 분석하여, 서양의 철학에 비견되는 공통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이미 서양의 철학적 사고에 익숙한 까닭에, 서양식 철학의 틀로 동양의 과거를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입니다. 쉽지는 않지만 일단 시도해 보겠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야! 너에게 앎에 대해 가르쳐 주겠다. 아는 바를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그것이 앎이다.”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자왈, “유! 회여지지호,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위정2-17>

유|由|는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의 본명입니다. <논어>에 이름이 거론되었다면, 이 사람은 공자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거나, 후에 제자를 많이 두어 <논어> 편찬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로는 전자의 경우입니다. 자로는 공자의 주유천하 14년 동안 한 번도 공자 곁을 떠나지 않은 제자입니다. 처음에 건달이었다가 공자의 인품에 반해 제자가 된 것은 앞서 얘기한 바 있습니다. 용맹스러웠으나 성격은 불같았습니다. 대체로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사람은 모르는 것도 안다고 우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로가 그러했나 봅니다. 평소에 그런 성향을 곁에서 지켜보던 공자가 자로를 불러다 놓고 조용조용 타이르는 장면 같습니다.

자로의 이름을 지그시 부르더니, 대뜸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겠다고 합니다. 그래놓고서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는 것’에 대한 정의를 내려줄 줄 알았는데, 전혀 엉뚱한 대답입니다. 정작 ‘아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동어반복입니다. ‘아는 것을 안다’, 즉 ‘A=A’라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공자의 말버릇이자 주특기입니다. 예를 들어, 제자가 인|仁|이란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러면 공자는 “인|仁|은 애인|愛人|이니라.”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자리에서는 “자신을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가면 인|仁|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논어> 전체를 통해 단 한 번도 인|仁|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仁|을 <논어>의 근본 가치이자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정작 공자는 단 한 번도 인이 무엇인지 속 시원하게 말한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삐딱하게 보면, 공자야말로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공자의 수제자들이 엮었다는 <논어>가 아무런 체계도 논리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공자 스스로가 그러하지 않았나 의심이 가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앞서 우리는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재단하지 않기’를 합의했습니다. 자본주의 문화와 사고에 익숙한 현재의 눈이 아니라, 공자가 말하고자 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할 것입니다.

공자는 아는 것이 무엇인지, 그 정의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말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한계를 이미 안 것 같습니다. 논어에 수없이 등장하는 인|仁|이니, 도|道|니, 군자|君子|와 같은 말을 단 한 번도 시원스레 정의한 적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가장 유명한 구절은 첫 장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도가도비상도”라는 구절입니다. 도를 도라고 말하는 것은 참된 도가 아니다, 이와 비슷한 뜻인데, 해석이 만만치 않습니다. 노자의 말은, 세상의 근본 이치가 있는데, 그것을 일러 도|道|라고 하지만, 도를 도라고 말하는 순간에 이미 그 도는 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하는 저도 헷갈립니다.

저도 비유로써 설명해보겠습니다.
누가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친구에게, “야, 아이스크림 참 맛있겠다.”라고 했다면, 그 아이스크림이 정말 맛있게 보인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좀 먹자고 요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언어는 이처럼 근본적으로 불명확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 국어사전을 펴들고 ‘알다’는 단어를 찾아보세요. 여러 뜻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그러하다고 믿거나 생각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러하다’를 찾아보세요. ‘(모양이나 모습이) 그와 같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같다’를 찾아보세요. ‘다르지 아니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르다’를 찾으면? ‘같지 않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언어로써 정의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같다’라는 말을 모르고서는 ‘다르다’라는 말을 알 수 없고, ‘다르다’라는 말을 모르고서는 ‘같다’라는 말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은 ‘같다’와 ‘다르다’를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알다’라는 말을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도 공자는, 이러한 무한 반복적이고, 어쩌면 무의미한 ‘규정’ 대신에, 살면서 꼭 필요한 실천적인 ‘자세’를 말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앎 자체의 규정이 아니라 앎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인 자세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굳이 서양의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모든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실천적 지혜(praxis)’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면, 공자의 다음 말을 보고 공자가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유추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다. 만약 어떤 농사꾼이 나에게 물으면 내 마음은 텅 비어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다만 (묻는 핵심의) 양면(긍정과 부정)을 따져 물음으로써 알려줄 뿐인 것이다.”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자왈, “오유지호재? 무지야. 유비부문어아, 공공여야. 아고기양단이갈언.” <자한9-7>

소크라테스도 늘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논쟁의 결론은 늘 ‘아직 그것은 모른다’였습니다. 무지|無知|에 대한 고백을 서로 인정하며 끝을 내는 것입니다.

위의 문장은 마치 소크라테스가 지구 반대편으로 건너와 공자로 변장하여 직접 한 말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똑같습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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