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 독살 사건

송년회 철입니다. 여기저기 술자리에 끌려(?)다니느라 몸고생이 이만저만 아닌 분들도 꽤 있을 것 같습니다. 술자리가 결코 반갑지 않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슴이 아픈 건 아무도 불러주지 않을 때입니다.
제 경우만 하더라도 해마다 송년회에 참석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일이 바쁘고 몸이 힘들어 한번 두번 빠지다 보면 나중에는 연락도 오지 않습니다. 연락이 와서 못 갈 것 같다고 말하면 채근하지도 않습니다. 으레 그러려니…

지난 주에 몇 차례의 술자리가 있었고, 여전히 바쁜 일도 많아 책 읽기가 수월찮았습니다. 그 와중에 오며가며 《조선왕 독살사건》을 읽었는데 지하철에서의 그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질 정도로 책 읽는 재미가 솔솔했습니다.
이 책은 2002년에 나온 《누가 왕을 죽였는가》의 개정판입니다. 올 7월에 개정판 첫 쇄를 찍었는데, 제가 읽은 것이 27쇄이니 역사서로서 超베스트셀러인 셈입니다.


   제   목 : 조선왕 독살 사건
   지은이 : 이덕일
   펴낸곳 : 다산초당 (초판 출간일 2005.7.8) / 2005.12.14일刊 초판 27쇄를 읽음 ₩13,000


조선의 국왕 중에서 독살설에 휘말린 인물은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포함해 9명이나 됩니다. 어떤 이는 예종까지 포함하여 10명 정도로 꼽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 중 여덟 명의 왕(소현세자 포함)들에 대한 독살설을 다루고 있습니다.

각각의 이야기가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그러나 흥미와는 별개로 책 읽는 내내 무언가 가슴이 답답함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역사인데, 결코 자랑스럽지도 내세우기도 뭣한 숨기고픈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말마따나,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려 한다고 해서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반성 없는 역사에 미래가 없다는 저자의 말에 가슴 깊이 공감을 하면서, 흥미진진한 독살 이야기를 오히려 반성의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책을 읽으며 알았던 사실은 조선은 결코 국왕이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지 결코 그들이 입으로만 부르짖는 군주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 말은 경우에 따라 매우 합리적인 국가 운영 시스템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춘추대의를 외쳤지만 실상은 구조화된 문치주의 아래서 지배계급의 지위나 계속 유지하려고 했던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결코 유쾌할 수가 없습니다.

조선은 27대 518년 간 유지되어온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왕조였습니다. 모든 왕조가 그러하듯 조선도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를 거쳤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일찌기 쇠퇴기에 접어든 후에도 무려 3세기를 존속한 매우 특이한 왕조였습니다. 여기서 쇠퇴기로 삼는 시점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입니다.
일본의 침략에 지배계급들이 도망가기 바빴던 바로 그 때 이미 조선의 지배체제는 붕괴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궁궐에 난입해 노비문서를 관장하는 장예원을 불지르고 선조의 어가를 막아 강계에 귀양 가 있는 정철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 이미 사대부/백성/노비의 신분제가 흔들린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무려 300년이 지속됐으니 이것을 저자는 비정상적인 생명의 연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국왕 독살설도 그 중의 하나인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6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거론됐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송시열과 같은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나라는 임금의 것이 아니라 천하의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천하’란 만백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대부’를 뜻하는 것으로, 나라는 임금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대부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임금은 다만 사대부 중에서 가장 높은 제1사대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좀 심하게 단순화하자면, 임금도 감히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커진 당력(조선 후기는 거의 노론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왕이 개혁의 칼을 들면 어김없이 ‘반정’이나 ‘독살’로 그 종말을 고했습니다. 물론 그 개혁의 칼 역시 만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왕권 강화가 근본 목표였다는 점에서 시대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백 보 양보해서 절대군주인 왕과 신하들이 상호 견제하면서 정사를 논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춘추대의를 외치지만 결국은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을 해왔던 수구 세력의 이중적인 모습에 속이 울렁거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는 조선의 군주보다 이미 죽은 남송의 주희를 더 떠받들던 송시열을 좌장으로 한 노론들. 두 번의 국가적 전란을 겪으면서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던 조선의 지배세력들. 말로는 농민의 피폐를 걱정하여 군비 확장(=왕권강화)을 반대하면서 고질적인 불균등한 조세체제는 결코 바꾸려하지 않았던 양반 사대부들. 이미 팔아치운 나라의 재건을 어떻게라도 막아야만 했던 친일파들. 추리 소설을 보는 듯한 흥미진진함 속에 그들의 고름내 나는 악취가 진동하여 책을 덮어도 개운치 않습니다.

역사가 반복되는 것인지 발전하는 것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백성들의 정신적 공황과 폭설로 인한 충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명분 없이 사학법 철폐를 외치며 마치 무슨 투사라도 되는 듯이 목청을 높이는 꼴을 보니, 그 고름내 나는 악취가 비단 이 책에서만 풍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책에 소개된 여덟 명의 독살 의심 내용 요약]

제12대 인종 대윤과 소윤 그리고 사림파 사이에서 재위 여덟 달 만에 급서
독살 의심자 : 문정왕후 윤씨(소윤)
제14대 선조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의 치욕을 겪고도 40년을 재위. 찹쌀밥을 먹고 죽다.
독살 의심자 : 임종을 유일하게 지켜본 인목왕후. 그러나 선조 독살설은 서인들이 집권의 정당성으로 삼기 위한 것으로 근거가 매우 취약함.
소현세자 9년 간의 볼모 생활을 통해 현실과 명분을 깨치는 눈을 키워 조선으리 개혁하려 했건만 귀국 후 급서.
독살 의심자 : 어의 이형익. 침을 놓은지 3일만에 급서.
제17대 효종 극심한 문치(文治)에 치를 떨며 북벌을 꿈꾸다 어이없게도 수전증의 어의로부터 침을 맞고 급서.
독살 의심자 : 수전증 어의 신가귀.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송시열을 위시한 노론 세력들.
제17대 현종 예송 논쟁에 가려진 비운의 임금. 서인 대신 남인을 등용하려다 급서.
독살 의심자 : 서인 세력이 매수한 환관들.
제20대 경종 겨우 4년 2개월 재위. 게장과 인삼차를 먹고 급서.
독살 의심자 : 이복형제 연잉군(영조)을 추대하려는 서인. (결국 사도세자의 비참한 운명으로까지…)
제22대 정조 규장각과 장용영, 영남의 남인 세력을 이용해 개혁하려다가 홧병(?)으로 급서.
독살 의심자 : 조선 초유의 국왕 암살단까지 조직한 노론 세력. 경옥고를 권한 노론 강경파 이시수, 정조 사망일에 갑자기 나타난 정순왕후 김씨.
제26대 고종 식민지 조선 백성의 군주로서 해외 망명을 시도하다 급서.
독살 의심자 : 고종 사망 당시 숙직이었던 친일파 이완용과 이기용. 밤참을 올렸던 두 궁녀. 그를 사주한 윤덕영, 한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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