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심코 지나치는 모든 사물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역사가 있습니다. 지천에 깔린 풀 한 포기 조차 고유한 이름이 있으며 유래가 있고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습니다. 도무지 역사와는 무관할 것 같은 도시의 회색 건축물에도 세월이 묻어 있습니다. 때로는 파란만장한 역사의 한 복판에서 오욕의 순간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지난 해인가 박정희 현판 논란이 있었던 광화문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왕자의 난과 중종반정을 지켜보고 왜란 때 불타버려 다시 만들고, 일제 때 조선총독부 앞에 서있는 폼이 못마땅하여 괜히 옆으로 뜯겨 갔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았다가, 박정권 때는 어이없게도 더 이상 타지 말라고 철근과 콘크리트로 복원되고 말았습니다.
하늘 아래에서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의 지식이 짧아 차마 그 세월의 흔적을 볼 만한 눈이 없을 뿐이겠지요.
제 목 :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
지은이 : 조이담 (박태원의 원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포함)
펴낸곳 : 바람구두 (초판 출간일 2005.11.10) 초판 1쇄를 읽음 ₩10,000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이하 《구보씨와…》)‘구보’는 많은 분들이 익히 아시다시피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등장하는 바로 그 구보씨입니다. 작자인 박태원의 호이기도 합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미혼이며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소설가 구보씨가 서울 거리를 배회하면서 느끼는 내면세계의 방황과 세태풍속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지식인의 무기력한 모습을 표현했다고 하기도 하고,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 읽어보면 그다지 재미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어느 룸펜이 경성 거리를 배회하면서 보고 생각한 것이 별 의미 없이 나열되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도무지 짜임새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읽었다면 분명 이 느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같지 않으리라…^^
《구보씨와…》는 박태원에 대한 전기이자, 박태원을 주제로 한 성장 소설이자, 구보씨의 일상을 통해 본 서울문화유산 답사기입니다. 소설가 구보 박태원과 그를 둘러싼 근대 역사 속의 여러 인물들, 그리고 당시 경성 거리의 풍경에 대한 사전 지식을 넉넉히 쌓고 다시 보면 사뭇 그 느낌이 달라집니다.
박제가 되어가고 있던 구보씨를 21세기의 눈으로 되살려낸 新 구보전 – 《구보씨와 …》를 읽다 보면 어느 새 매연 투성이 서울 거리가 정겨워지기까지 합니다. 하늘 아래 의미 없는 곳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 책에는 세 편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필자 조이담이 쓴 《경성만보객: 신 박태원 전》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조선 최초의 개업의인 구보의 삼촌부터 이광수, 윤치호, 한위건, 이덕요, 김산, 윤심덕, 최서해, 이태준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그 자체로 재미있는 역사 소설 한 편입니다.
두 번째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원작을 싣고 있는데 필자 조이담이 상세한 주해를 곁들여 놓았습니다. 옛 사진과 현대의 위성 사진, 신문 광고와 기사, 여타 문헌을 통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다시 태어납니다. 마지막으로 《구보와 이상의 경성 산책》이라는 짧은 화보집을 싣고 있습니다.
글은 세 편이지만 세 편이라 느껴지지 않습니다. 구보씨에게로 다가가는 배경 지식과 구보씨의 정신세계, 그리고 구보씨가 본 서울 거리의 풍경을 순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필자의 애정과 전문지식으로 만든 글이 원작과 거리낌 없이 어우러져 원작을 살찌웁니다. 구보씨와 당시의 경성 거리가 생생하게 복원됩니다. 과거의 눈으로 과거의 사실을 제대로 보기, 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되돌아보기, 둘 중 어느 하나 놓치지 않은 글쓰기의 전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재미에 흠뻑 빠지고, 글쓰기에 대해 한 수 배웠습니다.
기분 좋은 월요일 아침입니다.
2.
한겨레에 《묵향 속의 우리 문화유산》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미쓰코시 백화점》 편이 실렸습니다. 일본 최초의 백화점인 미쓰코시가 우리나라에 지점을 낸 것인데,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인 셈입니다. 처음에는 충무로 1가에 있다가 현재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옮겨 지으면서 경성 최고의 명물로 손꼽히는 ‘옥상정원’이 만들어집니다.
채만식의 풍자소설 《태평천하》를 보면 속물적인 만석꾼 부자 윤직원 영감은 그의 애첩 열다섯살 기녀 춘심이와 미쓰코시 근처 혼마치의 진고개 번화가를 갔다오다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 저기 미쓰꼬시 가서, 난찌 먹구 가요?” (하하, 난찌는 런치입니다. 대화는 이어집니다.)
“난찌라구, 서양 즘심(점심) 말이에요.” “서양 즘심?” ”내애, 퍽 맛이 있어요!” “아서라! 그놈의 서양밥, 말두 내지 마라!”
“왜요?” “내가 그년의 것이 좋다구 히여서, 그놈의 디 무어라더냐 허넌 디를 가서, 한번 사먹다가 돈만 내버리구 죽을 뻔히였다!” “하하하, 어떡허다가?” “아, 그놈의 것 꼭 소시랑을 피여 논 것치름 생긴 것을 주먼서 밥을 먹으라넌구나! 허 참…….”
소시랑을 피여 논 것치름 생긴 것을 먹다가 돈만 내버리고 죽을 뻔히였다,고 하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데, 마치 제 모습을 보는 듯해서입니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도 미쓰코시 백화점이 등장합니다. 이상의 절친한 친구였던 구보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는 미쓰코시 백화점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화신상회(백화점)이 등장하는데, 이는 박흥식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백화점입니다.
《구보씨와…》는 미쓰코시와 화신백화점에 대해 여러 사진을 곁들여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구보씨와…》를 보다 보면 종로와 을지로, 태평로, 충무로 등 구보씨와 이상이 노닐고 배회했던 그 공간이 신기할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TV 타큐멘터리로 엮으면 더욱 생생하고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3.
참, 그런데 말입니다.
이 이국적이고 낯선 모습들이 겨우 70년 전의 우리 모습이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