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길치입니다. 음치이기도 합니다만 주로 부르는 노래만 부르다 보니 심하게 듣기 거북한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길치적 특성으로 인해 여전히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견디다 못해 제가 선택한 것은 ‘내비게이션’입니다. 끌고 다니는 차에 어울리지 않게 비교적 초기에 내비게이션을 샀습니다. 이 문명의 기계는 바로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더 이상 차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됐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고, 오로지 목적지 주소 한 줄만 있으면 되니까요.
생활하면서 어떤 판단이 필요할 때 내비게이션처럼 속시원하게 도와주는 것이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실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삶을 뜯어보면 대개의 순간은, 말 그대로 순간적인 판단을 요구합니다. 누구에게 묻거나 꼼꼼한 자료 조사와 분석을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때가 많습니다. 특히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시간이 많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석’과 ‘판단’은 별개의 능력입니다. 뛰어난 야구 해설가가 반드시 야구 감독을 잘 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저명한 경제경영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이라고 하더라도 CEO로 성공한다는 보장 역시 없습니다. 경험을 통해 저는 ‘분석’과 ‘판단’은 전혀 별개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제 목 : 첫 2초의 힘 – 블링크
지은이 : 말콤 글래드웰 / 이무열 옮김
펴낸곳 : 21세기북스 (초판 출간일 2005.11.20) / 2005.11.25일刊 초판 2쇄를 읽음 ₩13,000
오랜만에 경제/경영 서적 하나 읽었습니다. <블링크 BLINK>는 ‘분석’과 ‘판단’이 왜 별개의 능력인지에 대한 제 근원적 고민을 속시원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올 여름에 <블루오션>으로 인해 충격과 영감을 동시에 받았는데, <블링크>도 그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신속한 결정이 신중한 결정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첫번째 주제입니다.
잘 학습된 합리적 사고가 안정된 상황에서는 도움을 줄지 몰라도, 가변적이고 복합적인 경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는 것. 우리의 순간적인 판단이 실제 수개월에 걸친 이성적인 분석만큼이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하기 위해 멈춰서는 순간 상황이 변하거나, 분석을 위한 수많은 자료들이 오히려 의사결정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순간적인 판단 – 흔히 말하는 직감, 직관, 통찰력, 순간 판단력 등 – 이것을 저자는 ‘블링크’라고 명명합니다. 원래 블링크란, 눈을 깜박꺼리거나 힐끗 보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나 긴급한 상황에서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첫 2초 동안 우리의 무의식에서 섬광처럼 일어나는 순간적인 판단’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합니다.
저자는 전작 <티핑 포인트>에서 ‘티핑 포인트’라는 말을 신조어로 만들었듯이, <블링크>를 통해 ‘블링크’를 신조어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두 책 모두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고 하니까요.
순간적인 판단이 중요하다?
이런 말을 듣는 순간 어디선가 이렇게 항변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런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앞부분을 읽을 때 저도 계속 이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능력은 모두 다르단 말야. 나는 눈썰미도 없고, 신속한 결정을 내리는 데 좀 약하지만, 그러나 종합하고 분석하고 정리하는 것만큼은 잘할 수 있단 말야. 나같은 놈이 본능적인 느낌에만 의존하여 무언가를 결정하면, 그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 어디있느냔 말이야…’ 이런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책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상황은 반전되었습니다. 머릿속의 의문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자는 순간적인 판단이 이성적인 숙고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만 강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례를 통해 보여줍니다. 이것이 이 책의 두번째 주제입니다.
복잡한 상황 또는 긴급한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순간적인 판단의 내막과 기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모를 흥미진진한 사례들을 한 보따리 풀어놓으며 전혀 지루함이 없이 순간적인 판단의 유용함과 해악,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한 얘기보따리를 시원시원하게 풀고 있습니다. 순간적인 판단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장시간 동안 엄청난 양의 자료조사를 한 셈입니다.
자, 이제 진짜 결론.
순간적인 판단 – 블링크 – 능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건 일에 대한 애정과 열정, 뼈를 깎는 노력과 숙고의 결과물입니다. 즉 경험 없이 순간적인 판단 능력을 키울 방법은 없습니다. 경험과 노력, 애정을 가지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 과정을 통해 ‘본능’조차 교육됩니다. 이것이 이 책의 결론이자 마지막 주제입니다.
아마 두뇌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본 분이라면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반복적인 학습과 경험이 신속한 판단을 위한 뒤뇌 속 ‘고속도로’를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혹시 실망하셨나요? 무언가 결정적 비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셨겠죠?
짧은 문장으로 된 결정적 비법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사례를 통해 가슴으로 느낀 단순한 진리만 있었을 뿐입니다. 남은 건, 내가 블링크 능력을 키우느냐 마느냐하는 스스로의 결정 뿐입니다. 그것은 내가 내 일에 보다 애정을 가지고 숙고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 – 이 글을 보시는 분들 모두 다르겠지만, 그 일에서 블링크의 위력을 발휘하시길 바랍니다. 블링크 공력을 키우는 한 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책을 덮으며 저의 길치적 특성 – 즉 방향에 대한 순간 판단력이 제로에 가까운 이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1. 멀리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학여행, 신혼여행, MT 외에는 가본 적이 없다. 2. 이동할 때는 주로 지하철을 이용한다. 즉 출발지와 목적지에 대한 개념만 머리에 있다. 그 과정은 모두 생략한다. 3. 운전을 뒤늦게 배웠다. 그나만 차는 늘 주차장에 있다. 4. 방향을 판단하기 위해 생각하기 보다는 표지판과 지도에 의존한다. 즉 생각하기 싫어한다. 숫자 계산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과정을 즐기고 길을 찾고자 하는 애정과 경험과 숙고가 이토록 없는데 어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