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는 건 어렵지 않은데 글 쓰기가 어렵습니다. 겨우 열흘, 몸이 아파 새벽에 일어나지도 글을 쓰지도 책을 읽지도 못했습니다. 주말에 좀 쉬니 몸은 나아진 듯한데, 새벽에 일어나고 보니 정신이 산만합니다. 귀한 새벽 시간, 한 시간을 넘게 아무 한 일도 없이 허비했습니다. 냉수 몇 잔 마시고, 책장 속의 책을 뒤척거리다가, 메일 확인하고, 노트북에 내장된 카메라를 처음 실행하면서 셀카를 하다가… 그러다가 책상 위에서 지난 주 읽다가 만 《한 줄도 너무 길다》는 하이쿠 시 모음집을 발견하고는, 마저 읽었습니다.
지난 주 몸살이 심했습니다. 몸이 아프니 책 읽는 것도 귀찮았습니다.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몇 페이지 읽다가 그냥 방치했습니다. 이른 퇴근길, 읽던 책은 읽기 싫고, 뭔가 좀 가벼운 책이 필요하다 싶어 근처 서점에 갔습니다. 일하는 곳이 종로라서 대형서점이 많습니다. 생각해보니 대한민국에서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 참 행운입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가까운 반디앤루니스에 들어갔습니다. 이 코너 저 코너 그냥 거닐었습니다. 걷다보니 금새 힘들어졌습니다. 집에는 가야겠는데 마땅히 들고 갈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걷기도 힘든데 괜히 왔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읽을 만하면 너무 두꺼워 질렸습니다. 몸이 아프니 평소 보고 싶던 책도 두껍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보기 싫어졌습니다. 몸 상태에 따라 마음도 달라지나 봅니다. 몸은 자연스럽게 시집이 있는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평소에는 절대로, 이 말은 좀 심하지만, 그래도 거의 거들떠 보지 않다가 이렇게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우울해야 시집을 찾습니다. 세상이 행복해지면 아마 시인은 굶어 죽을 겁니다. 한참을 기웃거리다가 시집 세 권을 집어 들었습니다. 류시화가 엮은 《한 줄도 너무 길다》, 김용택의 《시가 내게로 왔다》, 그리고 신경림의 최신작 《낙타》, 이렇게.
제 목 : 한 줄도 너무 길다
지은이 : 류시화 엮음
펴낸곳 : 이레 / 2000.3.15 초판 발행, 2007.11.5일刊 초판 12쇄를 읽음 ₩6,000
이제 본업(?)을 시작해야죠. 오늘도 시작부터 잡담이 길어졌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까닭은, 이 귀한 시간에 나를 돌아보거나, 책을 통해 나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입니다. 책의 권위를 빌리고, 책의 우수한 콘텐츠를 방패 삼아 제 생각 살짝 얹어 글을 씁니다. 때로는 짧고 때로는 깁니다. 독서유감, 예전에는 독서노트라고 했는데, 이것을 처음 쓸 때만 해도 거의 책 내용 위주로 썼습니다. 요약할 때도 많았구요. 그런데 독서유감으로 이름을 바꾸고서는 주저리주저리 잡담이 많아졌습니다. 책은 여벌이 될 때도 있습니다. 생일 잔치에서 주인공을 내팽개치고 객들끼리 생일 핑계 삼아 먹고 마시듯.
류시화 시인이 엮은 《한 줄도 너무 길다》는 하이쿠 모음집입니다. 하이쿠는 5,7,5 음절로 이루어진 일본의 정형시입니다. 매우 매우 짧은 시입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짧은. 너무 짧아 읽기에는 전혀 부담이 없습니다. 요즘 감기몸살이 유행이라는데 혹시 오늘 몸이 아픈 분이 계시다면, 혹 서점에 가실 힘이 있으시다면, 이 책은 한 권 사 볼 만합니다. 가볍게 읽고, 그러나 가슴 깊은 감동이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좀 울적하고 몸도 좀 아픈 상태에서 봐야 제맛(?)입니다. 아주 건강한 상태에서 본다면 오히려 시시껄렁해보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짧아서…
-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
헛! 감탄사 한 방 절로 튀어 나왔습니다.
- 가을이 깊었는데
이 애벌레는
아직도 나비가 못 되었구나
그렇지! 세월이 흐른다고 모두가 성숙해지는 건 아니지…
- 벌레들조차도
어떤 놈은 노래할 줄 알고
어떤 놈은 노래할 줄 모른다
그래… 혹시 내가 너무 내 기준으로만 사람들을 판단한 건 아닐까?
-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아, 나무의 윤회…
- 오늘밤은
너도 걸음을 서두르는구나,
가을달이여
일모도원(日暮途遠)인가,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걸까…
- 땔감으로 쓰려고
잘라다 놓은 나무에
싹이 돋았다
저런, 어떻게 해야하지? 새싹마저 그대로 불구덩이에?
- 내 앞에 있는 사람들
저마다 저만 안 죽는다는
얼굴들일세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