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밥을 굶든 말든… 김치는 잘 익어간다는 클라쎄 김치냉장고의 광고가 갑자기 떠오릅니다. 지난 주에 민방위 교육이 있었는데, 그 연사 무어라 하든 말든 귀를 닫고 잠시 지친 몸을 쉬다가(= 졸다가~) 일어나 책을 보았습니다. 민방위 교육장에서 읽기 적당한 크기의 범우사 문고판 《톨스토이 인생론》입니다.
제 목 : 톨스토이 인생론
지은이 : 톨스토이 / 박형규 옮김
펴낸곳 : 범우사 (초판 출간일 1982.6.30) / 2005.1.20일刊 3판 1쇄를 읽음 ₩2,800
그런데, 아~ 이 책, 읽다가 잠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먼저 역자 서문. 서문은 대개 본글을 읽기 전에 흥미를 유발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문에서 지쳐버립니다. 다음은 역자 서문 한 토막.
바로 그런 이유로 오늘날 우리들이 《고백》으로 시작되는 톨스토이의 생애 후기의 일련의 사상적,종교적 저술을 읽으면서 느끼는 일종의 리거리즘(rigorism), 독단성, 강압성, 자기과신, 비상식, 논리의 약점, 사상과 실천 간의 모순 등과 같은 것에 대한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그가 다루고 있는 형재애, 행복과 불행, 선과악, 국가와 사회, 전쟁과 평화 등과 같은 엄청나게 크고 근원적이며 인생 전체에 걸친 문제, 또 그 가운데서 긴장감을 가지고 강하게 부딪치게 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 의식과 그 민중성,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의 근저에 숨겨져 있는 톨스토이의 독자적인 강렬하고 거대한 사상에서 오히려 겸허하게 그러한 것을 배워야 할 톨스토이이즘의 현대적 의의 같은 것을 찾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 주어이고 서술어인지, 글을 읽다가 혼란에 빠져버리는 이런 문장들을 힘겹게 읽으면서, 엉뚱한 곳에서 기운을 소모해버립니다. 역자의 문체가 이러해서인지, 아니면 톨스토이의 에세이가 원래 이러한 문체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작고 얇은 책 한 권, 오며가며 가볍게 읽기에는, 내용이 아니라 문장 자체로 결코 쉽지 않습니다.
책 날개에 보면, “이 책은 그의 이러한 무정부주의와 인도주의적 사상이 집약된 명저”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전 그 정도로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명저라고 하기에는 문체가 지독하게 단조롭고, 그의 사상이 집약되었다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단순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단순함으로 인해 그의 일관된 사상의 집약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말하는 인생은 곧 “행복에 대한 희구”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참된 행복”이어야 하며, 참된 행복은 “참된 생각”으로부터 비롯되며, 참된 생각은 이성적 생각이 동물적 개성을 종속시켰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그릇된 생각이며, 그로부터 발생하는 가짜 행복은 곧 ‘쾌락’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며, 궁긍적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참된 행복에 대한 희구, 곧 동물적 개성이 이성의 법칙에 지배를 받을 때, 톨스토이는 그것을 ‘생명’이라고 정의합니다. 아무나 아무렇게나 ‘생명’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합니다.
톨스토이의 ‘생명’에 대한 정의는 글 초반부터 시작하여 중반에 이르기까지 끊임 없이 반복됩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생명은, 생명의 특정 면만 다루고 있을 뿐 일반적인 생명에 관해선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인간과 생물의 역사를 연구해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연구 결과로 생명이 어떠하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생명’이라는 단어에, 일반적인 의미 외에 가치와 도덕 규범을 덧칠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성적 의식’ ‘동물적 개성’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인 용법과는 달리, 이 단어들을 매우 힘주어 말하고 있지만, 한 번도 이런 단어에 대한 정확한 정의 없이 그만의 용법 대로 써나가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상당한 혼란을 느꼈습니다.
머릿속으로 개념을 정리해가며 읽었습니다. 특별한 정의 없이 일반적인 어휘를 톨스토이식으로 읽자니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생명 = 생존 + 이성적 의식에 의한 행복에 대한 희구’, ‘이성적 의식 = 참된 생명이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 ‘동물적 개성 = 동물적 본성(본능)’…
이렇게 열심히 정리하다가도 중간쯤 가서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면 이성적 의식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 이성은 정의될 수 없다. 또 우리는 이것을 정의내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이성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밖에 알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이성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그 ‘자체’이므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성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활의 기준이 되는 법칙 그 자체’라고 정의 아닌 정의를 합니다.
흔히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달을 가리키는 그 손가락이 구부러져 있을 때는 그 손가락부터 바로 펴고 볼 일입니다. 톨스토이의 손가락 끝은 도대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제게는 둥그렇게 구부러져 보일 따름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찬물에 세수를 했습니다. 제대로 눈이 떠지지 않으니 찬물로 세수를 해서라도 몸을 깨워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어찌보면 이것은 매우 자연스럽지 못한 행동입니다. 몸은 자려하는데 나의 의식은 기어이 내 몸을 깨우려 합니다.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나와의 끊임 없는 싸움 – 이것을 한 순간도 느끼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비록 끔찍한 만연체 문장과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어휘의 동어반복적 사용으로 인해 질려버리기는 했지만, 글을 쓰기 위해 PC의 전원을 켜면서, 문득 톨스토이가 말한 행복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아무리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화학적,물리적 현상을 연구했다 하더라도(나무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그 나무는 이들 곤찰이나 지식에 의해 수액을 모으고 그것을 가지나 잎, 꽃이나 열매의 성장을 위해 분배할 필요성을 자기 스스로 추리할 수는 없다.
사람도 이와 똑같은 것이다. 제아무리 자기가 동물적 개성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을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이러한 법칙은 자기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한 조각의 빵을 어떻게 처분하면 좋을지, 즉 아내에게 주어야 하는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가, 개에게 주어야 하는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가, 개에게 주어야 하는가, 자기가 먹어야 하는가, 또는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가 하는 등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제공하지 못한다.
톨스토이는 인식론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인식론’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로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하는 인생론, 즉 인생에 대한 그의 가치관을 말했을 따름입니다.
철학적 인식론을 건너 뛴 가치론에서 손가락은 바로 펴져 있든 구부러져 있든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손가락이 구부러져 있던 이유도 책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드디어 밝혀집니다.
책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제1장 28~30)
인간의 삶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고, 그가 희구하는 대상은 반드시 그에게 주어진다. 죽음이 될 수 없는 삶과, 악이 될 수 없는 행복이 바로 그것이다.
아~ 진작 처음부터 이렇게 얘길하시지, 왜 이제서야…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원시 크리스트교를 생활의 윤리적 규범으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윤리적 규범을 근거로 한 노동과 금욕, 검소한 생활을 말하고 있었으며, 이로써 달성된 나의 행복과 다른 모든 이들의 행복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넘어선 다른 모든 이들의 행복을 통해 죽음이 주는 ‘생명’의 단절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가 그토록 ‘생명’에 대해 반복적으로 이야기했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런 생명이 곧 참된 행복이라고 말한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