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잠실 근처에 있습니다. 얼마 전 잠실에 교보문고가 들어섰습니다. 예전 강남에 진솔문고가 있었는데 그 옆에 교보문고가 들어선 후 얼마 있지 않아 문을 닫은 적이 있습니다. 잠실 교보문고의 등장으로 건너편 세종문고가 큰 타격을 입을 것 같습니다. 어떠한 형태든 집중화된 권력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 도서 유통 권력의 대명사인 교보문고의 등장이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성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실제 가보니 역시 좋긴 좋습디다. 넓은 매장에 수많은 책들 – 발품을 들이지 않고서 한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어 여간 편리한 게 아닙니다. 새삼스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문학 코너를 지나다가 노란 표지에 “탐독”이란 글자가 크게 씌어진 책을 발견했습니다. 제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정우 지음. 책 표지에는 부제격으로 “유목적 사유의 탄생”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제 목 : 탐독
지은이 : 이정우
펴낸곳 : AGORA(초판 출간일 2006.2.27)/초판 1쇄를 읽음/ 값 13,000원
이 책은 책에 관한 책입니다. 학문에 관한 학문을 메타 학문이라 하니 이 책은 메타 책이라 부르는 게 어떨까요?이정우 교수는 책과 더불어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독서광입니다. 아니 철학자이니 독서광이라는 표현보다는 사유광이라는 게 낫겠습니다. 이 책은 이정우 교수의 책 읽기 기록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 굳이 다 읽을 필요도 없이, 왜 책의 부제가 ‘유목적 사유의 탄생’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목적’이라는 말이 곧 ‘가로지르기’라는 말입니다. 특정 분야에 매몰되지 않는 그의 독서 편력에 저같은 초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책 전체를 통해 그의 지적 편력과 사유의 깊이가 나타나있지만, 책 또는 사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부분이 아닌 그의 ‘가로지르기’ 심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몇 부분만 옮겨적어보겠습니다.
- 나는 공학자가 되기에는 여전히 너무 인문적이고 감성적인 인간이었다. …… 그때부터 물리학, 생물학, 독일문학, 역사학 등 담론 세계를 가로지르는 긴 유목이 시작되었다. 한참 후인 30대 중반까지도 그 유목은 힘들었고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달았다. 바로 그 유목이 내 사유라는 것을. …… 역설적으로 표현해서 유목에, 가로지르기에 안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p.187)
지적 유목을 시작한 후로 자연과학, 사회과학, 역사, 문학 등 여러 담론의 세계를 유랑했지만, 결국 철학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과학철학, 그리스 철학, 프랑스 철학, ‘동양’ 철학 등 철학세계 내에서의 유랑은 계속되었고, 지금은 결국 철학의 테두리에서도 벗어나버렸다. …… 지금은 내가 철학자라고도 또 다른 무엇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사유하는 사람, 저작 활동과 교육 활동을 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 사람들이 갈라놓은 범주들은 내게는 의미가 없다. 오직 내가 생각하고 있는 문제, 다루고 있는 주제에 따라 관련되는 연구와 사유를 할 뿐이다. 내 학문은 다음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선택하지 말고 창조하라.’ (p.285~p.286)
내가 원하는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 하나는 세계, 인간, 역사의 근저를 파고드는 사유, 다른 한 측면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다른 실증과학들을 충분히 섭렵한 수준에서 이야기하는 사유, 또 하나 욕심을 부린다면 문학적 생기가 넘치는 사유. 이 세가지 측면을 모두 갖춘 사유였다. (p.302)
사유한다는 것은 구체와 추상을 끝없이 오르내리는 것이다. …… 가장 구체적인 것(개체들, 사건들, 마주침들)에서 가장 추상적인 것(존재, 우주, 생명) 사이를 끝없이 왕복 운동하기. 그 사이에 분포되어 있는 어떤 분야, 전공, 영역, 사조에 정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가로지르면서 사유하기. 이 오르내림, 가로지르기, 유목에의 깨달음으로부터 철학자로서의 내가 탄생했다. (p.320)
그의 책 읽기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그의 지적 폭과 깊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제게는 자극이 되었고, 그 자극만으로도 – 아직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았음에도 – 가슴이 벅찹니다.
한편, 어릴 때부터 책으로 둘러싸여 자연스레 책을 접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제게 늘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그러하지 못한 환경에 대한 부질없는 후회는 일찌감치 버렸으되, 이 대목에서, 내 자식들에게라도 그런 환경을 물려줘야한다는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이정우는, 문학책을 읽으면서 인간과 인생을 깊숙이 반추하고, 과학책을 읽으면서 물질, 생명, 문화를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배우고, 철학책을 읽으며 다양한 지식들을 창조적으로 종합할 수 있는 사유 능력을 배웠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추와 분석과 사유입니다. 한마디로 스스로 생각함입니다.
그가 인상 깊게 읽었다는 여러 책들이 소개되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책들의 리스트나 줄거리가 아니요, 그를 통해 얻은 그만의 사유 능력입니다. 그가 읽은 책을 수년 안에 초단기로 따라갈 수는 있을지언정, 오랜 시간 반추와 분석과 사유를 통한 그와 같은 지적 능력은 쉽게 따라할 수 없습니다. 삶 자체를, 사유를 습관으로 하는 삶으로 바꿀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 습관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떠할지 몰라도 제게만큼은 자극과 감동 100%,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책입니다.
저자 : 이정우
1959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에서 섬유고분자공학을 공부했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오의 비교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은 『담론의 공간』(1994)으로 출간되었다.
1995년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취임했으며, 1997년에는 90년대 한국 사회의 문화적 모순을 다룬 『가로지르기』를 출간했다. 1998년 서강대학교에서 사임했으며, 2000년 최초의 철학대안학교인 철학아카데미를 창설해 현재까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그 사이 전통-근대-탈근대의 문제를 다룬 『인간의 얼굴』(1999)을 출간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특강을 실시, 그 결과가 『시뮬라크르의 시대』(1999), 『삶, 죽음, 운명』(1999), 『접힘과 펼쳐짐』(2000), 『주름, 갈래, 울림』(2001)으로 출간되어 나왔다(『시뮬라크르의 시대』와 『삶, 죽음, 운명』은 2003년에 개정, 합본되어 『사건의 철학』으로 재출간되었다). 이 책들을 통해 서구 형이상학과 현대과학 그리고 동북아 사상의 전통을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론을 모색했다. 2001년에는 사이버펑크 영화들에서 인간 정체성의 문제를 읽어낸 『기술과 운명』을, 2004년에는 철학의 기초 개념들을 해설한 『개념―뿌리들』 1, 2권을 출간했다. (Yes24 저자 소개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