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87개 주제로 엮은 《주제로 보는 한국사》 제2권 – 고려편을 읽었습니다. 고려편은 30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리뷰는 이것저것 각설하고 내용 요약만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어설픈 평가보다는 읽은 내용을 정리해두는 것이 나중에 다시 볼 때 훨씬 유용했습니다. 또한 이 글을 읽는 분들께도 약간의 지식이나마 더 전해드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제 목 : 주제로 보는 한국사 2 – 고려편
지은이 : 이정란
펴낸곳 : 고즈윈 (초판 출간일 2005.12.15) / 초판 1쇄를 읽음 ₩15,000
1. 용(龍)의 후손, 고려 왕실
- 용(龍)의 후손임을 표방한 고려 왕실
분열된 후삼국의 통일적인 구심점을 위해 신성시할 필요가 있었는데, 국초에는 고대적 유풍이 남아있어서 가능했다. 200년이 흐른 의종대에 편찬한 《편년통록》에도 용의 설화를 재생산한 것은, 계속된 반란 등으로 인해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위함이었다. - 왕자의 이름이 ‘외자’였던 까닭은?
왕의 이름에 쓰인 한자를 백성들이 함부로 쓸 순 없었다. 이를 피휘(避諱)라 한다. 왕자란 국왕이 될 수 잇는 후보자이므로 훗날에 있을 문제의 소지를 미리 없애는 차원에서 외자의 이름을 선택하여 하나만을 피휘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것도 자주 사용되지 않는 한자를 골랐던 것이다. - 근친혼(近親婚)하는 고려의 공주들
고려의 공주는 근친혼을 하였다. 그것도 100퍼센트에 가까울 정도로 거의 모든 공주들이 근친혼을 하였다. 《고려사》열전에 실린 71명의 공주 중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미혼으로 생을 마감한 사례를 제외하면 3명만 근친혼을 하지 않았다. 그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으니, 거의 100퍼센트 근친혼을 한 셈이다. 일반적으로 종실의 남자를 선호했지만 이복남매끼리 혼인하기도 했다. 왕건은 29명의 왕비 사이에서 25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낳았는데, 9명의 공주 중 신라 경순왕과 혼인한 2명과 기록이 없는 1명을 제외한 6명의 공주는 모두 이복남매와 결혼했다. - 고려의 공주들은 성(姓)을 왜 바꾸어야 했을까?
근친혼을 하여 왕과 왕비의 성이 같아 발생할 수 있는 중국과의 외교적 문제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성을 고치면서 아울러 그 성씨의 본관을 자신의 고향으로 삼았고, 그 성씨의 사람들을 친척으로 여기며 정치적 기반까지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 국왕의 아들이었지만 ‘왕자’가 될 수 없었던 소군(小君)
아버지가 국왕이더라도 어머니의 신분이 왕비가 되기에 부적합할 경우, 예를 들어 궁인일 경우, 그 소생 자녀는 일반 왕자와 공부와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 중에서 남자아이는 소군(小君)으로 칭했는데, 어려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야 했다. 당시 소군은 국왕의 서얼이었다. 비록 국왕의 아들이었지만 왕자로서의 특혜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더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소군을 어린 나이에 승려로 만든 첫번째 이유는 국왕의 아들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는 데 있었다.
고려는 이의민,조원정,석린 등 천계에 가까운 사람조차 최고의 관직에 올랐던 개방적(?)인 사회였던 반면, 피의 순수성 유지라는 차원에서 보면 조선보다 더 엄격한 신분사회였다.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나 국왕이 되었던 영조가 만약 고려에서 태어났다면 결코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승려로 출가했어야 했으니까. - 왕을 꿈꾸었던 사람들
《고려사》의 이의민에 대한 기록은 꿈에서 시작하여 꿈으로 끝난다. 이의민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9층탑에 올라가는 꿈을 꿨다. 이의민이 서울의 군인으로 뽑혀 아내와 함께 개경에 당도했을 때, 그날 밤 꿈을 꿨는데, 긴 사다리가 성문으로부터 대궐까지 뻗쳐 있고 이의민은 그것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다 올라가지는 못했다. 그는 결국 고려 무신 집정기에 최고 집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다 왕위까지 넘보았는데 결국 실패하고 만다. 꿈에 사다리 끝까지 오르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
2. 고려 귀족들이 살아가는 법
- 붉은 가죽띠로 묶인 스승과 제자
좌주는 해당 연도의 과거 합격자가 자신들이 치른 시험을 관장하였던 지공거와 동지공거를 부르는 호칭이다. 은문이라고도 했다. 좌주 자신이 관장했던 과거에 합격한 인물을 문생이라 했고, 같은 좌주 밑에 있는 문생들끼리는 서로를 동년이라고 했다. 공민왕이 유생들을 개혁의 동반자로 여기지 않고 개혁의 대상으로 여기며 이런 말을 했다. “유생은 유약하여 강직함이 적고 또 문생이니 좌주니 동년이라 칭하면서 무리를 지어 정(情)에 따른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좌주와 문생의 관계를 미화하는 글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뿌리깊은 학맥의 미화작업에 다름 아니다. 좌주와 문생의 관계에는 국왕조차 개입할 수가 없었는데, 고려의 왕 중에는 자신이 직접 좌주가 되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왕도 있었다. 충렬왕이 그러했다. - 부자 아버지와 가난한 아빠
어린 나이에 돈으로 과거에 합격했던 경우가 많았다. ‘분홍방’이라는 말이 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우왕 11면 3월에 윤취가 과거시험을 관장하면서 합격시킨 사람이 모두 세력있는 집안의 젖내 나는 아이들이었다. 당시인들은 이를 비웃어 ‘분홍방’이라 하였으니,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분홍색의 옷 입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5세의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상경하여 여든까지 청렴하게 살다간 함유일과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는 가난하여 늘 해진 옷과 뚫어진 신발을 신고 다녔는데, 무신 집권기에도 그가 지나가면 군사들은 병기를 거두었다고 한다. - 글쟁이들의 모임, 시회(詩會)
무신 집권기에 문신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벼슬길이 막혀있던 그들에게 딱히 소일거리가 없었는데, 살아남은 몇몇 문신들은 시회를 조직하였다. 그 중 유명한 이가 ‘죽고칠현’이었는데, 중국의 죽림칠현을 본따 만든 이름으로, 거기에는 이인로, 오세재, 임춘,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등이 있었다.
시회를 통해 벼슬을 얻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규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나이 23세에 과거에 합격했지만 30이 되도록 관직에 오르지 못했는데, 당시 최고 집정인 최충헌이 참여한 시회에서 그를 찬양하는 시를 지어 관직에 오르게 된다. - 어머니의 교육열에도 상을 주었던 나라
고려는 어머니의 ‘교육열’에 대해, 자녀의 과거 합격이라는 영광과 함께 어머니에게도 큰 상금과 영예를 내려주었다. 3명의 아들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켰을 경우, 그 어머니에게는 ‘녹봉’과 봉작이 지급되었다.
3. 고달팠던 고려인의 삶과 죽음
- 세금의 원천이었던 고려 백성
고려에서는 농민을 ‘백정’이라 불렀다. 조선의 백정이 ‘소를 잡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집단을 의미한다면, 고려에서는 일반 백성을 가르켰다. 백은 희다는 뜻으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며, 정은 16세에서 59세에 이른 성인 남자를 지칭했다. 즉 아무른 권리도 의무도 없는 특혜도 없는 계층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의무만 있고 특혜는 없는 불쌍한 계층이었다.
고려의 백성은 세금의 원천이었다. 아무런 특혜도 없이. ‘십시일반’이라는 고사도 여기서 유래했다. 의종 때 중미정 증축에 동원된 역졸들이 그들이 싸온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역졸은 몹시 가난하여 점심조차 싸올 수 없었다. 이에 다른 역졸들이 밤을 한 술씩 덜어 먹게 했다는 데서 십시일반이라는 말이 나왔다. 만약 오늘날 관변 단체에서 사람을 동원할 때 ‘점심제공’만 조건으로 제시한다면 누가 오겠는가, 그러나 당시에는 무임금에 점심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땅을 가진 농민은 수확량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냈다. 고려에는 전시과라는 것이 있었는데, 관직 복무의 대가로 지급되는 토지이다. 전시과는 지급 대상 토지는 국유지가 아니라 일반 백송 소유지였다. 즉 일반 농민의 소유지를 전시과라는 명목으로 관직자에게 나누어주어 세금을 걷도록 했다. 원래 전시과는 관직을 떠나면서 반납해야하는데 그러하지 않고 세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후기에는 농민의 소유지에 심지어 수조권자(세금을 걷는 자)가 5~6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 새 나라를 꿈꾸었던 일반 백성들
고려 시대에 정쟁적 성격이 강한 반란은 전 시기에 걸쳐 고루 발생했다. 반면 민란은 무신정권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발했다. 무신집권기에 유독 민란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은 무신정변 이후의 정치기강의 문란과 중앙 통제력의 약화에 따른 것이다. - 축제와 놀이의 나라, 고려
고려시대 내내 연등회와 팔관회는 빈번하게 개최되었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원래 불교 행사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불교적 색채보다는 축제의 성격이 강했다. 그에 소요되는 비용되 만만치 않았다. 또한 많은 노동력도 동원됐는데, “우리나라는 봄에 연등을 개최하고 겨울에 찰관을 열어 널리 많은 사람을 징발하므로 노역이 심히 번거롭습니다.”라고 일찍이 최승로가 그 폐단을 지적했지만, 이 문제는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전쟁중에도 이 환란의 축제는 지속됐으니, 백성들에게 그나마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앗아가버렸다. - 아들만 부모를 모시라는 법은 없다
제목 그대로. 부연 설명이 필요없을 듯^^ (사실은 지금 시간에 쫓기고 있습니다^^) - 의술의 발달과 신토불이 한약재(韓藥材)
당약(唐藥)이 아닌 향약, 즉 신토불이 약재를 개발하여 일반인이 더 쉽게 약재를 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고려 시기, 정확히 말하면 고려 후기부터였다. 대표적인 의서로 《향약구급방》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에서조차 전문의사가 아닌 승려의 의료행위에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 고려에는 고려장이 없었다
고려인들이 고려장을 했다는 분명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는 아마도 불교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노인을 버리는 이야기는 불교 경전 《잡보장경》에 있는데,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의 이야기로 둔갑한 것 같다. 중국의 《효자전》에도 이와 비슷한 고사가 있다.
실제 고려인의 장례는 다비라고 불리는 불교식 화장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화장한 후에 다시 매장하는 이중장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 고려인이 무덤에 남긴 것들
특이할 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극락왕생을 기원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무덤인 현릉과 정릉. 그리고 여러 고려인들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금화에서 숟가락, 일대기를 적은 묘지명에 대한 이야기 등
에구구, 오늘도 시간에 쫓기어 남은 부분 정리는 다음으로 미루어야겠습니다.
(이렇게 미뤄둔 것이 한 둘이 아닌데…^^)
4. 고려 사회의 이중성_개방성과 폐쇄성
- 기생과 비(婢) 소생으로 최고 권력자에 오르다
-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사관(史官)
- 권력의 정상에 선 여성 정치인
- 장가오는 남자들
- 아들 딸 구별 없는 균분 상속과 ‘부부별산제’
5. 역사의 갈림길에 선 사람들
- 순간의 선택이 생사를 가른다
- 묘청의 반란과 인종의 선택
- 기괴한 만남과 신돈(辛頓)의 선택
- 최영(崔瑩)의 선택과 위화도회군
6. 세계 속의 고려
- 세계 속의 고려, Korea
- 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명품과 토종 브랜드
- ‘황제의 나라’를 표방한 고려
- 명분과 실리의 현명한 조화, 고려의 외교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