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삼경을 읽었습니다. 아니, 실은 사서삼경을 읽은 사람이 써놓은 글을 읽었습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한바탕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상명대 중문과 김경일 교수가, 사서삼경을 읽고 느낀 바를 아주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낸 책입니다.
제 목 : 사서삼경을 읽다
지은이 : 김경일
펴낸곳 : 바다출판사 (초판 2004.2.23 / 2006.3.15일刊 초판 9쇄를 읽음/ 값 12,800원
제목만으로도 만인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 비해, 《사서삼경을 읽다》는 너무 초라해 보입니다. 마치 제목을 짓기 싫어 그저 가져다 붙인 느낌마저 듭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 내용을 보자면, 《공자가…》 때 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비판의 화살이 빗발치리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공자가…〉를 읽어보지 않았으나, 사서삼경 중 처음에 해당되는 〈논어〉 편을 보면, 지레 그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논어〉를 읽기도 전에 독자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합니다. 납작한 돌을 주워 공자와 〈논어〉에서 보이는 권위와 위선의 물결 위로 사뿐하게 물수제비를 뜨자고…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리고 매우 거칠게 표현하자면 〈논어〉와 〈주역〉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그 외에는 중립적이거나 다소 우호적입니다. 〈논어〉에서는 권위와 위선을 들추어내고, 〈주역〉에서는 세상의 이치를 64괘로 한정하여 절대시하는 원시적 믿음에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반면 〈맹자〉와 〈중용〉,〈대학〉,〈시경〉,〈서경〉에서는 취해야 할 것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기 때문에 그 본질이 흐려 보일 수 있습니다.
된장을 통해 콩맛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두부를 보고 콩의 모양을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김경일 교수의 《사서삼경을 읽다》를 읽고, 사서삼경의 맛을 알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내용의 옳고 그름을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김경일 교수의 눈으로 해석하고, 다듬은 사서삼경 ‘써머리’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사서삼경에 대한 경외감 혹은 거부감을 없애고, 현재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식가의 혀와 저처럼 3,000원짜리 싸구려 음식 맛에 길들여진 혀가 느끼는 맛도 사뭇 다르듯이, 맛은 어차피 내가 느끼는 것. 이 글 또한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세상에 그러한 맛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들에게는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인터넷 서평을 보니, 혹자는 김경일 교수의 글을 보고, 유학에 대해 일말의 지식도 없는 사람 취급하며 흥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분, 어지간히 화가 났던지 여기저기 글을 옮겨놓으셨습니다. 물론 전작에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독설을 퍼부었으니 저자 자신에게 돌아올 이 정도의 돌팔매도 충분히 예상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 성균관의 테러도 상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아까 그분, 아마 화가 치밀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셨나 봅니다.
“유교문화가 정치적인 복종으로 미화해버린 의도만 걸러낼 수 있다면 원칙을 따라 삶을 일구어가는 발걸음은 여전히 아름답게 보인다.” (p.215)
〈중용〉을 설명하면서 한 이 말이, 제가 판단한 김경일 교수의 유교에 대한 근본 인식인 것 같습니다. 비록 전반적으로 삐딱하고 과격한 표현을 하기는 했으나, 오래되면 때가 묻는 법, 시간이 흘러오면서 덧씌워진 권위와 위선을 벗겨내는 작업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야 어디 수천년 쌓인 두터운 외피를 벗어낼 수 있겠습니까. 유학자라면, 오히려 《공자가…》나 이 책처럼, 비록 공자와 유학을 비판하였으나, 이로 인해 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긴 것만으로도 반겨야하지 않을까요.
요즘 식당에 가면 메뉴판도 화려합니다. 문자로만 씌어있지 않고 예쁘게 조리한 사진이 곁들여 있고, 짧은 설명도 달아놓았습니다. 이 책, 마치 이런 메뉴판 같습니다. 시켜보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음식을, 사진이 있어 외형이나마 볼 수 있어 좋은, 그런 메뉴판 같습니다. 그러나 사진을 보고 주문한다고 해서, 그 음식 그대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다행히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더라도 상상하던 맛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먹기 전까지는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을 읽고, 어디 가서 사서삼경을 아노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비슷한 것을 보았노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 교수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문을 한 번쯤은 읽고, 스스로 생각할 기회가 꼭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배우고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하는 자세에 대해 〈중용〉에 나오는 한 문장을 뽑습니다.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박학지, 심문지, 신사지.
넓게 배우고, 상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라.
제가 고른, 이 책 전체에서 최고의 명문입니다. 이제 나의 눈으로 사서삼경을 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스스로 깊게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김경일 교수의 글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有弗學, 學之, 弗能, 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 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 弗措也.
유불학, 학지, 불능. 불조야, 유불문, 문지, 불지, 불조야. 유불사, 사지, 불득, 불조야.
차라리 배우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배우기 시작했다면 익숙해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묻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물으면 정확히 알기 전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생각을 하게 되면 얻어지는 것이 있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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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 책 중간중간에 한자 원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구 풀이가 있는데, 참으로 탁월합니다. 한자 풀이가 참으로 쏙쏙 들어옵니다.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設 : 말할 설. 여기서는 기쁠 悅(열) 대신 사용되고 있다. 해서 발음도 흔히 ‘열’로 읽는다. 뭐 대단한 의미는 없다. 이런 종류의 대체 현상은 한자 문헌에서는 콩밥에 쌀알만큼이나 많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사실 設의 고대문자 꼴과 悅의 고대문자 꼴은 상당히 닮았다. 게다가 옛날에는 대나무에 칠을 발라 글씨를 쓰기도 했기 때문에 그놈이 그놈 같아 베껴 쓰는 과정에서 오류가 심심찮게 발생하곤 했다. 그 많은 오류 중의 하나다. 그러니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