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 신분이 미천했다
휴~. 힘드시죠? 공자를 알기 위해 너무나 많이 에둘러 왔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공 선생님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논어>에 보면, 공자가 직접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어려서 미천하였기 때문에 자질구레한 일을 두루 잘하게 되었다.”
공자의 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공자가 가문 있는 집안의 꼬장꼬장한 노인네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시골 촌뜨기였습니다. 게다가 오늘날 농구 선수처럼 2미터가 훌쩍 넘고 얼굴은 우락부락했습니다. 그런 그가, 만세의 목탁으로 칭송을 받기까지, 공자의 삶은 그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개천에서 용 난 격입니다.
공자|孔子|의 자|子|는 원래 남자를 부르는 통칭이었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스승이나 덕이 있는 남자를 부르는 말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자라고 하면 ‘공 선생님’ 정도의 의미가 됩니다.
공자의 이름은 공구|孔丘|, 구|丘|는 ‘언덕 구’자입니다. 평평한 땅에서 조금 튀어나와 있는 부분이 언덕입니다. 공자가 태어났는데, 가만히 보니 머리가 툭 튀어 나왔길래, ‘그래 이름은 언덕!’, 아마 이렇게 지었나 봅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짱구’. 나쁘게 말하면 무식, 좋게 말하면 재치가 돋보이는 작명입니다. 이에 질세라 공자도 역시 아들을 낳았는데, 그 때 누가 산후조리를 하라고 잉어를 고아먹으라고 가져왔나 봅니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잉어|鯉|. 아버지는 짱구, 아들은 잉어. 그 집안, 정말 이름 짓기가 귀찮았나 봅니다. 인디언의 작명법이 생각납니다.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캐빈 코스트너의 상대역이었던 인디언의 이름은 ‘주먹 쥐고 일어서’, 족장 이름은 ‘열 마리 곰’, 전사 이름은 ‘머리에 부는 바람’이었습니다. 이것을 공자가 지었다면 ‘악기|握起|’, ‘십웅|十熊|’, ‘두상풍|頭上風|’이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공자의 아버지는 제나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적이 있는 하급 장교였습니다. 공자의 체격은 아버지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합니다. 그러나 공자가 세 살 때 별세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은나라까지 올라갑니다. <예기>를 보면, ‘그런데 구는 은나라 사람이다 |而丘也,殷人也|’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앞서 주나라가 은나라를 정복한 다음 은나라 유민들을 송나라에 봉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 후 대대로 송나라에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 때에 난을 피해 노나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공자가 아주 먼 과거를 들먹이며 은나라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태어난 건 노나라였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데다가 어머니는 정실이 아니었나 봅니다. 공자의 탄생과 관련하여 <사기>에서는 ‘야합|野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들판에서 합쳤다는 뜻인데, 어딘지 모르게 비정상적이었다는 뉘앙스가 풍깁니다. 순서로 봐도 세 번째 부인이었습니다. 성은 안씨입니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65세였는데 반해 어머니는 18세였다고 합니다. 나이차가 거의 50년입니다. 그러니 정식 결혼을 했다손 치더라도 ‘야합’이라고 비난받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세 살 때 돌아가시고, 공자 나이 열 일곱 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마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본가와는 멀리 떨어져 살았는데다가 ‘야합’으로 맺은 관계여서 남편의 장례식에도 초청을 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무덤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을 수밖에요.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공자가 독학하여 후세의 목탁이 되었으니, 공자 어머니 안씨야말로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킨 어머니의 모범입니다. 어진 어머니 상으로는 맹모삼천지교로 유명한 맹자의 어머니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맹자를 추종하는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공자의 어머니가 무녀|巫女|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어려서부터 굿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는 어릴 때 소꿉장난하기를 좋아했는데, 항상 도마와 목기 등의 제사그릇을 벌려놓고, 예|禮|에 맞는 복장을 입고 놀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아마 이 때의 예|禮|가 굿거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는 장례 전문가 집안의 출신이라고도 합니다. 당시의 장례는 매우 까다롭고 번거로워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장례 전문가를 유|儒|라고 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논어의 구절을 보면, “어려서 미천하였기 때문에 자질구레한 일을 두루 잘하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잘나가는 집안의 아들이었다면 어렸을 때 공부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기술을 배우고 익힌 것은 아마도 집이 가난하여 잡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집도 가난하고 신분도 보잘것 없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공자가 열 다섯 살 때의 일입니다.
계씨|季氏| 집안에서 무슨 잔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공자도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양호|陽虎|라는 작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계씨는 사|士|를 대접하려 한 것이다. 감히 네가 올 자리가 아니다.”
<사기> <공자세가>에 나오는 말입니다. 공자가 사|士| 계층에도 미치지 못하는 일반 서인|庶人|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앞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사|士| 집단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천한 위치를 벗어나 사|士|가 되었을까요? 앞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사와 서인은 모두 피지배계층입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는 서로 신분 이동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공자는 어떻게 미천한 신분에서 사|士|로서 대접을 받게 될까요?
답은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미친 듯이 공부해서!
학문에 뜻을 두고 오로지 공부하다
공자는 늘 제자들을 몰고 다녔습니다. 움직이는 사설학원이었습니다. 학원이라는 표현이 좀 거부감이 있다면 ‘컨설팅 연구소’라는 표현은 어떨까요? 자신을 써줄 임금을 찾아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정치 컨설팅을 했으니까요. 학원 원장이든 컨설팅 연구소 소장이든 그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서는 제자들을 사로잡는 그 무엇이 있어야겠죠. <사기>나 <공자세가>, <논어> 등에 나타난 공자의 언행을 보면, 그는 정말 박학다식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결코 온순할 것 같지 않은 인상과 체격에도 사람들이 줄줄 따랐던 것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풍기는 인품 또한 매우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도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이것저것 잡일을 해가며 살았던 공자가 어떻게 수천의 사람들이 따르는 대형 학원의 원장이 되었을까요? 그가 보아왔던 것은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굿이나 제사 때 행하는 의식 정도밖에는 없었을 텐데요.
공자의 성격이자 특기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호학|好學|’입니다. 배우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여, 일찍부터 문자를 터득하였고 닥치는 대로 문헌을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공자가 십오 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삼십 세에 홀로 섰으며, 사십에 흔들림이 없었고,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고, 육십에 들은 것은 모두 이해하게 되었고, 칠십에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지학, 이립, 불혹, 지명, 이순, 종심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나중에 학|學|을 이야기할 때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그가 십오 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것은, 아마도 앞서 이야기한 양호 사건 때문이 아니었나 봅니다. 잔칫집 문전에서 ‘우리는 선비들을 초대한 것이지 너 같이 미천한 놈을 초청한 것이 아니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 충격이 오죽했겠습니까. 미천한 신분을 어떻게든 탈피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유일한 방법으로, 가진 것이 없는 그에게 오로지 공부밖에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