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26일 경향신문 20면 손병목의 학부모 마음 읽기
계획-실천 능력을 키워주는 붙임쪽지
[원고 원본]
곧 지진이 일어난다 해도 꾸물거릴 것 같은 아이가 있다. 초등학교 2학년 성원이가 그런 아이다. 성원이 엄마는 세상에 바쁠 게 전혀 없는 것 같은 아들을 보고 있노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답답함에 화가 난다. 남들처럼 학원에 많이 보내는 것도 아닌데 하루가 너무 짧다. 영어학원 숙제와 학교 숙제를 하는 데 저녁 시간을 모두 소요한다. 엄마 계산으로는 성원이가 마음먹고 하면 자기 전까지 충분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언제쯤 그런 저녁 시간의 여유를 누릴 수 있을지, 하루하루가 답답하다.
성격이 조금 급한 편인 엄마와 성원이의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이 타들어가는 건 엄마뿐이다. 아이는 느긋하다. 유아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이에 속한다. 엄마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제를 아이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야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반면에 해야 하는 줄은 알지만 습관이 안 된 아이들도 있다. 대개 초등학교 고학년이 이에 해당된다. 이런 아이는 마음먹고 하면 할 수 있고, 실제로도 가끔 그렇게 할 때가 있다. 그러나 평소 그런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는 좀 다른 사례이지만 아이의 능력에 비해 엄마가 지나치게 많은 과제를 부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과제를 줄여주는 것만으로도 바로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엄마의 기대 수준이 높아 과제를 줄이지 못할 때가 꽤 많다. 많이 하는 것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유아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대개 과제 수행의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다행인 건, 이 시기에는 비록 과제나 규칙의 필요성은 몰라도 그것을 지키고 완수하는 것만으로도 성취감과 쾌감을 느끼는 시기다. 엄마가 만들어놓은 규칙은 지키고, 엄마가 시킨 일을 끝냈을 때 아이는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엄마, 나 잘했지?”라고 아이들이 묻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럴 때 엄마가 “시키지 않아도 하는 모습을 보니 엄마 마음이 든든하구나”라고만 얘기해도 아이는 충분한 내적 보상을 받는다. 반면 초등학교 고학년은 해야 할 일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있다. 필요성도 느끼고 있다. 다만 하기 싫을 뿐이다.
꾸물거린다는 것은 실행기능 중 ‘계획하고 우선순위 정하기’, ‘과제개시’와 ‘목표집중’ 기능 등이 약하다는 뜻이다. 아이의 능력에 비해 과제가 지나치게 많지만 않다면, 엄마의 체계적인 지도로 이와 같은 실행기능을 개선할 수 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규칙적인 수면 습관이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 자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을 매일 지키는 것은 시간관념을 익히는 가장 기본적인 습관이다. 이 습관이 없는 아이들 중 계획하고 실천하는 능력이 우수하다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 이 점은 어른도 마찬가지다. 취침과 기상 시간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은 건강을 지키고 실행기능을 함께 향상시키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취침과 기상 시간을 규칙적으로 한 후에는 계획하고 실천하는 데 보다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시계를 볼 줄 알고 시간관념이 어느 정도 생기는 7세 이후 시작하는 것이 효과가 크다. 먼저 하루 중 해야 할 일을 아이와 같이 선택한다. 처음에는 엄마가 먼저 꼭 해야 할 일을 나열하고, 아이에게 또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면 된다. 이렇게 말한 내용은 반드시 종이에 써야 한다.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데는 시각화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아이들이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담을 수 있다. 해야 할 일들을 적었으면, 그 일을 하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아이에게 물어본다. 터무니없이 예측한 시간을 빼고는 아이가 예측한 시간을 그대로 적어둔다.
이제 본격적으로 계획표를 그린다. 처음에는 일간계획을 먼저 세운다. 초등학교 2학년 이상은 주간계획을 세우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일주일 동안 해야 할 일을 생각하여, 주간계획에 고루 배치하는 것이다. 먼저 시간표를 그린다. 시간표는 되도록 크게 만드는 것이 좋다. 한눈에 보이도록 해야 한다. 시간대별로 여유 공간이 많아야 한다. 처음 일일계획을 세울 때는 붙임쪽지(포스트잇)를 이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붙임쪽지에 해야 할 일과 예상 소요시간을 적는다. 붙임쪽지를 붙이는 순서는 아이가 정한다. 엄마가 보기에 순서가 조금 못마땅해도 넘어간다. 스스로 세우지 않은 계획은 모두 부담이 된다. 우선순위를 세우는 법도 중요하지만 아직은 나중의 문제다. 시간은 충분하다. 계획을 세울 때는 2:8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최소한 20% 정도의 여유 시간은 있어야 한다. 시간 내에 완수하지 못한 일은 그 여유시간에 벌충해야 한다. 시간 내에 완수하면 그 시간은 온전히 아이의 자유시간이다.
과제를 제시간에 완수하면 작은 보상을 마련한다. 하나의 과제에 하나의 선물을 배당해도 되고, 포인트 제도를 만들어도 된다. 모든 보상은 내적 보상이 원칙이다. 아이 스스로 성취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외적 보상은 초기에 습관을 잡기 위한 재미와 놀이 요소임을 잊어선 안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상은 차차 줄여가고, 보상 기간은 길게 잡는다. 과제별 보상에서 하루 단위 보상으로, 하루 단위 보상에서 주간 단위 보상으로 차차 길게 잡는 것이 좋다. 하나의 과제를 끝내면 충분한 격려와 보상을 한다.
실천 후에는 반드시 실제로 걸린 시간을 표시한다. 과제와 예상시간이 적혀있는 붙임쪽지에 실제 걸린 시간도 적는다. 다음날 계획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처음 예측한 시간과 실제로 걸린 시간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아이와 얘기를 한다. 왜 더 오래 걸렸는지, 더 빨리 끝내고 자유시간을 즐길 방법이 없는지 얘기를 한다. 맞벌이 부부라면 시간의 여유가 있는 주말에 먼저 시도한 후 평일로 확대하는 것이 좋다.
아이와 함께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절대 지시하거나 충고하거나 훈계, 비판해서는 안 된다. 처음 아이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과정은 놀이여야 한다. 엄마가 지나치게 진지하면 아이는 지키고 싶은 마음보다 지켜야하는 부담만 가지게 된다.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한 비판과 훈계보다는 하나라도 지켜낸 행동에 아낌없이 칭찬하고 격려할 때 자발적 실천이 가능해진다. 엄마는 감시자가 아니라 코치임을 잊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