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같지 않게 요즘은 띄엄띄엄(?) 만나 뵙습니다. 고전을 읽으며 여러 자료를 정리하느라 따로 시간을 내기가 만만치 않아 정작 본업(?)인 독서노트 쓰는 일은 뒷전입니다.^^
저에게 독서노트는 이제 지식의 정리 차원은 넘어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기수양에 가깝습니다. 정리를 하는 행위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자는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는 것은 스스로 게을러지기를 경계하는 의미가 더욱 큽니다.
발분저서|發憤著書|라는 말이 있습니다. 발분은 분발|奮發|과 같은 뜻으로 마음과 힘을 다해 떨쳐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정신으로 책을 쓰는 것을 발분저서라고 합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마음가짐을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독서노트를 쓰는 것을 사마천이 《사기》를 쓰는 것과 빗대어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가당치 않은 비유입니다만, 여하튼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러해야하는 이유와 목적 의식이 있어야 이룰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마천의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사기》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사마천의 생애 그 자체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한 편의 감동적인 휴먼 스토리입니다.
그 중 하일라이트가 바로 ‘이릉의 화’입니다. 오늘은 ‘이릉의 화’와 발분저서하는 그의 마음을 정리할까 합니다. 좀 깁니다.
사마천의 생애에 대해 가장 잘 다루고 있는 책은 하야시다 신노스케가 지은 《인간 사마천》입니다. 이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릉의 화와 발분저서, 구우일모, 태사직필의 고사를 엮어 보겠습니다.
제 목 : 인간 사마천
지은이 : 하야시다 신노스케 / 심경호 옮김
펴낸곳 : 범우사 (초판 1997.8.16 / 2004.9.15일刊 1판 2쇄를 읽음/ 값 10,000원
남들이 모두 Yes라고 할 때, 나만 No!
때는 기원전 99년. 사마천은 죽기보다 더 어려운 고통을 당합니다. 친구 이릉을 변호하다 남근을 제거당하여 환관이 되는 치욕의 형벌을 당합니다. 이를 일러 ‘이릉의 화|李陵之禍|’라고 합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일입니다. 당시 한나라 북쪽의 흉노는 한나라 최대의 골칫거리였습니다. 무제 전의 왕이었던 문제|文帝|,경제|景帝| 시대에는 가급적 흉노와 싸우지 않고 화친하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그들을 자극해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나 무제는 달랐습니다. 한나라 건국 이래 4대 동안 축적된 재원을 이용해 흉노 정벌이라는 적극적인 정책을 취합니다. 이는 중국 주변의 이민족을 한나라 지배 아래 두려는 대통일 정책의 일환입니다. 이때의 상황을 사마천은 <흉노열전>과 그때 활약한 장수들의 전기인 <위장군,표기열전>, <이장군열전>에 수록하였습니다. 흉노 정벌 정책에 대한 사마천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흉노열전>에서 사마천은 “장군들은 중국의 광대함을 믿고 강한 기세를 과시하고, 주상도 그것에 휘둘려서 전쟁 정책을 결정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또한 초기 흉노 정벌에 큰 공을 세웠던 위청과 곽거병 장군에 대해서도, 그 공은 인정하지만 그들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위청 장군은 은근히 무제에게 아부하는 면이 있었고, 곽거병 장군은 최상품의 쌀과 고기를 내버릴 만큼 많이 가지고 있었음에도 병사들은 굶주리고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어쨌든 무제의 흉노 정벌로 인해 한 왕조 창업 이래 풍부했던 재원은 고갈되고 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세금 부담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마천에게 인생 최대의 고통과 수치와 울분을 안겨준 ‘이릉의 화’는 이때 발생합니다. 사마천의 친구인 이릉도 무제의 명령을 받고 흉노 정벌에 참여합니다. 이릉의 아버지는 이광. 그는 키가 크고 원숭이처럼 팔이 길었다고 합니다. 그 팔로 활을 쏘면 화살이 바위마저도 뚫었다고 합니다. 당시 흉노는 이광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전해집니다. 이광 장군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는 매우 청렴하고 부하를 사랑하기로 이름이 났던 무인이었습니다. 매년 이천 석의 봉급을 받았지만 번번이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어 그가 죽은 뒤에 재산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청렴한 무인이었던 이광의 아들이 바로 이릉입니다. 이릉도 그 성격이 아버지와 같아서 군관들과 병졸들을 사랑하고 겸손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당시 흉노 정벌군의 총책임자는 이광리였습니다. 이광리는 무제가 아끼던 이부인의 오빠로 무제가 가장 신임하던 장수였습니다. 이광리가 출병할 때를 즈음해서 무제는 이릉에게 군량미 보급로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릉은 무제에게 자신이 훈련시킨 군사들로 정예부대를 만들어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제는 기마병을 줄 여유가 없다며 거절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이릉은 기마병도 없이 보병 오천 명을 이끌고 흉노의 소굴로 진격합니다. 그러나 흉노의 주력군 삼만 명에게 포위를 당합니다. 비록 6:1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릉의 군대는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흉노를 놀라게 만듭니다. 놀란 흉노는 기마병 팔만을 더 모았습니다. 이쯤 되니 아무리 용맹한 이릉의 군사들이라 해도 흉노의 공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흉노에 투항하여 내부 사정을 고발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퇴각을 거듭하던 이릉은 부하들에게 밥을 든든히 먹인 다음 십여 명의 결사대만 데리고 적중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사이 부하들을 탈출시키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릉은 흉노에게 잡히고 맙니다.
이 얘기가 흘러 흘러 “이릉의 군대가 항복했다.”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했다.”고 한나라 조정에 전해집니다. 이 말을 들은 무제는 매우 낙담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릉의 군대가 흉노와 용감히 싸워 이긴다는 소식을 들으며 그를 한껏 추켜세웠던 신하들은, 이제 일제히 이릉을 비난합니다. 낙담한 무제에게 아첨하느라, 이릉은 무모하며 장수로서 절의를 지키지 못한 채 투항했다고 쓴소리를 했습니다. 무제는 상심하였고 또한 분노했습니다. 무제는 이릉을 그래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마천에게 이번 사태에 대한 의견을 구합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합니다.
-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하였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하오나 끝까지 병졸들과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을 같이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은 필시 훗날 황은|皇恩|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으로 사료되오니, 오히려 폐하께서는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오소서.”
이것이 무제의 역린을 건드렸습니다. 무제는 사마천이 이릉을 칭찬한 것은 당시 흉노 정벌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이광리를 비판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릉이 결사적으로 싸우고 있는데 최고 사령관으로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이광리를 비판한 것으로 오해한 겁니다. 이광리는 무제가 총애하던 이부인의 오빠이며 가장 믿고 있던 장수라는 것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 무제는 사마천을 감옥에 가둡니다. 설상가상으로 흉노에 투항했던 이릉이 흉노군을 훈련시켜 한나라 군대와 전투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무제의 분노는 폭발하였고, 감옥에 있던 사마천은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훗날 밝혀졌지만 이 때 흉노군의 실전 훈련을 담당했던 자는 이릉이 아니라 이서라는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사마천 앞에는 세 가지 선택만이 남았습니다. 이대로 사형을 당하느냐, 50만 전을 내고 한 등급 아래로 감형받느냐, 아니면 남근을 제거하고 환관이 되어 사형을 면하느냐.
아홉 마리 소 중에서 털 하나 없어지듯, 그렇게 죽을 수는 없다
당시 사형을 면하는 방법은 어마어마한 돈을 내거나,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버리는 궁형|宮刑|으로 대신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사마천은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러나 50만 전이라는 거액을 마련할 길은 없었습니다. 이대로 죽느냐, 아니면 남근을 제거당하고 환관으로 살아가느냐. 그는 당시 선비로서 죽음보다 더 치욕스러운 궁형을 선택합니다. 그때의 심정을, 또 다른 사형수이자 친구였던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九牛一毛|’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나쁜 말을 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네.
그는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궁형을 당하고 보니 그것은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이었습니다. 살아남아도 고개 한번 제대로 못 들고 수치스러운 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치를 떨었습니다. 대신 그는 이를 깨물며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한 《사기》의 완성을 다짐했습니다.
- 좌구명은 눈이 멀고 나서, 손자는 다리가 잘리고 난 뒤에 저술에 전념하여 그 분통한 심정을 문장으로 적어 표현했네. 나도 또한 변변치 못한 재주이지만 문장에 의지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결심했다네. 천하에 흩어져 있는 역사적 사실과 전설을 하나씩 모으고, 과거에 살았던 인간의 행동과 사건을 깊이 관찰하여 그 성공과 실패의 원리를 규명하고, 위로는 황제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통해, 하늘과 사람의 경계를 연구하고, 옛날과 지금의 변화를 통해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 했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저술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이릉의 화를 당했다네. 이대로 미완성으로 끝내는 것은 너무도 애석하여, 극형을 받으면서까지 분노의 안색을 내비치지 않은 것이라네. 만약 이 역사서가 완성되어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받은 치욕을 보상받는 것이네.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이 몸이 여덟으로 찢긴다 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좌구명과 손자에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위의 글에서는 생략했지만 주나라 문왕, 공자, 굴원, 여불위, 한비자 등 유배되거나 형벌을 받고나서 발분하여 책을 쓴 사례를 더 들고 있습니다. 좌구명은 눈이 멀고 난 뒤에 <국어|國語|>를 썼다고 합니다. 손자는 손무 또는 그의 후예인 손빈을 가르키는데, 여기서는 손빈을 가리킵니다. 전국시대에 병법가로서 병연이라는 친구와 함께 공부를 했는데, 훗날 병연은 손빈을 시기하여 슬개골을 자르는 빈형에 처합니다. 이 때부터 이름을 ‘빈’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오로지 《사기》를 쓰는 것 자체가 삶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했지만, 어느덧 그 자신의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책을 완성하지 않고서 결코 명예회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마천은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사기》 백삽십 편을 완성합니다. 훗날 그의 바람 대로 사마천이라는 이름 석자는 청사에 깊이 새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일러 발분저서|發憤著書|라 합니다. 발분하여 책을 썼다는 뜻입니다.
내가 남기지 않으면 그 누가 이들을 기억하리오
사마천은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았지만 이미 한 번은 죽었던 목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천대하던 환관의 몸으로 얼굴 한번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릉의 화를 떠올릴 때면 “내게 죄는 없다. 이것을 어찌 죄라고 말할 수 있으리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짐승의 터럭보다 가볍게 사람의 목숨을 짓밟아버리는 황제에 대한 분노로 가슴이 터지는 듯했습니다. 이 굴욕을 만회하는 길은 오로지 《사기》를 완성하는 길밖에 없다고 여긴 사마천은 《사기》의 저술을 서두릅니다. 그로부터 8년 뒤 《사기》는 마침내 완성됩니다.
그러나 사마천이 그토록 《사기》를 완성하고자 했던 이유가 그저 이 뿐이었을까요? 아버지의 유언이기 때문에,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하여? 아닙니다. 그는 이릉의 화를 당하기 전에 이미 《사기》를 필생의 과업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릉의 화 때문이 아니라, 이릉의 화를 겪으면서까지도 살아남아 《사기》를 완성하고자 했던 역사가로서의 사명감이 더 컸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유언이기는 했지만, 스스로 자신이 아니면 잊혀져버릴 역사를 꼭 남겨야 한다는 역사가로서의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무균질의 인격체의 대명사 백이,숙제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엽기적 독서광 김득신이 1억1만3천 번을 읽었다던 그 <백이전>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도 공자가 언급하지 않았으면 역사 속에 묻혀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 안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명은 안회였는데, 공자가 가장 신임하였던 제자였습니다. 공자보다 서른 살이나 아래였으나 너무 가난한 나머지 영양실조로 공자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비록 요절하였지만 공자에 의해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의 전형으로 후세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알려진 사람이 겨우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마천은 바로 그 점에 주목했습니다. 시세에 부합하지 않은 까닭에 비록 어질고 어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깜깜한 동굴 속에 파묻혀 영원히 그 이름이 잊혀진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사마천은 스스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되어, 그가 남기지 않으면 영원히 잊혀져버릴 사람들을 역사에 남기려 했습니다. 그의 붓을 통해 그들의 원한과 슬픔을 달래고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마천은 ‘열전|列傳|’이라는 독특한 형식의 전기를 칠십 편이나 썼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열전이 <백이열전>입니다.
재야 역사가 사마천의 불온한 서적 《사기》
이릉의 화가 있고 난 후 8년 뒤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합니다. 그러나 그가 평생을 두고 완성한 《사기》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의 책은 당대 군주였던 무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던 까닭에 함부로 발표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사마천의 생전에 《사기》가 널리 읽혔더라면, 그래서 당시 군주였던 한 무제의 눈에 띄었다면, 《사기》는 당장 금서가 되었을 것이고, 사마천은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의 일족도 모두 무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멀지 않은 과거를 돌이켜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천 년 전의 일이니 오죽했겠습니까.
그는 왜 이토록 무모한 일을 저질렀을까요?
그는 왕명에 의해 역사서를 편찬하지 않았습니다. 대개의 역사서가 왕명에 의해 관|官|에서 만들었지만, 사마천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사명감으로 《사기》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마천은 마음대로 자료를 취사선택했고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습니다. 설령 사람의 목숨을 벌레처럼 짓밟아버리는 절대군주가 있다 해도 그의 눈치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유자재로 붓을 휘둘러, 동시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현대사를 거리낌 없이 써낼 수 있었습니다. 《사기》에 동시대 인물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오늘날 불후의 ‘고전|古典|’으로 통하는 《사기》는, 사실은 당대 현대사였습니다. 그는 오로지 옛일만 기록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바로 그 시대 그 역사를 담고자 했습니다. 그에게는 태사직필|太史直筆|의 정신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옛날 춘추시대 제|齊|나라에 최저라는 가신이 있었습니다. 당시 군주는 장공|莊公|이었는데, 호색한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장공이 최저의 집에 갔다가 그의 아내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습니다. 그 후 장공은 기어코 그녀를 불러내어 정을 통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최저는 복수를 결심합니다.
최저는 병이 들었다고 소문을 냅니다. 장공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대담하게 최저의 집으로 곧장 가서 부인의 방으로 향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최저는 부하들을 시켜 장공을 포위합니다. 장공이 소리칩니다.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냉큼 비켜라!”
그러자 최저의 부하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여기에는 음탕한 도둑놈이 있을 뿐이다. 임금은 없다.” 그리고 장공을 무참하게 살해했다고 합니다.
그 후 최저는 장공의 동생을 임금의 자리에 앉히니, 그가 바로 경공입니다. 최저는 당시 임금보다 더 권세가 높은 권력자였습니다.
이 때 제나라의 태사|太史|, 즉 역사관은 백|佰|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최저는 백에게 임금이 학질을 앓다가 급사한 것으로 적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태사 백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최저가 군주를 살해하다|崔杵弑其君|’라고 썼습니다. 이를 안 최저는 노하여 그 기록을 찢어버리고 백을 끌어내어 죽여버렸습니다.
당시 태사 자리는 그 아들이 계승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백의 아들이 어려 그 동생 중|仲|이 태사직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런데 중도 역시 최저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형이 썼던 것과 똑같이 썼습니다. 최저는 중도 죽여버렸습니다. 중이 죽자 그의 동생 숙|叔|이 태사가 되어 그 역시 형들과 똑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최저는 숙도 죽였습니다.
백에게는 세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중과 숙이 죽자 막내 계|季|가 태사직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도 역시 죽음을 무릅쓰고 형들과 똑같이 썼습니다. 최저가 그를 불러 위협을 하자, 태사 계는 의연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릇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역사입니다. 내가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또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이가 생길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것은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의 기록만은 결코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서슬 퍼런 최저라 하여도 내리 세 사람까지는 죽일 수가 없었던지, 그 기록은 고스란히 역사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고사를 가리켜 태사직필|太史直筆|이라고 합니다.
임금의 명을 받든 태사조차도 이러한데 거리낌 없는 재야 역사가 사마천은 당대의 역사를 왜곡하여 쓸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곡학아세|曲學阿世|, 즉 배운 것을 굽혀가면서 세속에 아부하여 출세하려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습니다. 《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권세에 아부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의롭게 살다 죽어간 이들에 대한 그의 찬사를 통해 사마천이 그들의 모습에 바로 자신의 처지를 담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훗날 명|明|나라 사조제라는 사람은 《사기》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 《사기》는 두 번 다시 이루어질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기》는 민간에 전해지고 명산에 간직해두고자 만든 책이지, 관에서 만든 서적으로 공표될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은 마음대로 자료를 취사선택하였고 어느 누구의 간섭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여러 사람들, 나아가 한 무제의 행동에 이르기까지 그 선악을 솔직하게 기록하여,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었다. 이런 역사서는 지금 사람이 만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만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왕조가 바뀌면서 《사기》는 그 진면모가 드러나 불후의 역사서로 칭송되었지만, 사마천이 살았던 당대에는 감히 ‘어느 누구도 만들려 하지 않’은 지극히 불온하고 위험한 역사서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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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할 말이 많습니다. 자욱히 쌓인 세월의 먼지를 정성껏 털어내고 들추어보기 전까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락방을 청소하다 옛 일기장을 발견하고서는 한동안 가슴이 뭉클해지는 그런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세월의 장막을 걷어내고 그 때로 돌아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에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일이관지|一以貫之|하고 있는가? 잃어버린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고전을 읽는 큰 행복 중의 하나입니다.
- 人有鷄犬放, 則知求之, 有放心而不知求
인유계견방, 즉지구지, 유방심이부지구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찾으러 나설 줄 알면서
마음을 잃었는데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