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의 벽

이 책을 읽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어딘가의 서평을 보았거나 누군가의 글에서 인용되었기 때문에 샀을 겁니다.
요 몇 일 회사 워크샵을 다녀왔는데요, 그 때 간간히 읽었구요, 첫 장을 읽으면서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어라, 이것도 두뇌 과학 책이네”
최근에 3권의 두뇌 과학 또는 학습법 책을 연속하여 리뷰한지라, 우연찮게 집어든 책도 또 그러할 줄은 몰랐거든요^^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두뇌 과학 책은 아닙니다.
저자가 도쿄 대학 의학부 교수라 비교적 자세하게 의학적 지식 – 특히 두뇌에 대한 지식을 잘 활용하여 개인과 교육, 나아가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문제로까지 그 관심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저자의 강연을 모아 출판사 편집국에서 편집한 것입니다. 따라서 책 내용에 다소 일관성이나 논리적 흐름이 단절된 곳도 종종 보입니다.
어쨌거나, 책 내용을 조금만 요약해 보겠습니다.

제1장 : ‘바보의 벽’이란?

이 책은, 기타자토(北里) 대학 약학부 학생들에게 보여 준 BBC 방송의 임신에서 출산까지를 추적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합니다.
이 비디오를 본 대부분의 여학생은 “정말 좋은 공부를 했습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한 반면, 남학생들은 한결같이 “그런 내용은 보건 수업에서 모두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것을 보고서 나타나는 이 상반된 반응 – 이런 차이는 어디서 나타나는 것일까요?
짐작하셨겠지만, 이는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정보를 차단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즉 일종의 ‘바보의 벽’이 있어, 외부의 정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위의 예에서, 남학생은 세부 사항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리고 ‘그런 건 다 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르면서 말입니다.

제2장 : 뇌 속의 계수

뇌에 들어오는 정보를 ‘입력’이라고 하고, 그 정보에 대한 반응을 ‘출력’이라고 하고, 이 입출력을 일차방정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y = ax
여기서 y는 출력, x는 입력(정보), a라는 계수는 ‘현실의 무게’쯤으로 해둡니다. 사실 a를 규정하기 위한 정확한 명칭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1장에서 예로 든 임신출산 비디오를 본 학생들의 반응을 이 방정식에 적용하면, 남학생들의 계수 a의 값은 0이 됩니다. 즉, 입력은 했으나 계수 a가 0이므로 출력 y도 0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정보는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반면 어떤 종교의 교주, 알라의 말씀, 성서의 말씀 등은 대개 그 신자로 하여금 a의 값을 한없이 크게 만듭니다. a가 무한대에 가까워 그 사람의 행동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게 됩니다.

제3장 : ‘개성을 기르라’는 기만

인간의 의식이란 철저하게 공통성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젊은 사람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개성을 기르라고 말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애시당초 우리 몸에 주어진 것이므로 그것을 굳이 기르라고 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의식은 철저하게 공통성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언어’를 들고 있습니다. 사람의 피부 이식 수술을 할 때 다른 사람의 피부가 절대 달라붙지 않는다는 것을 예로 들어 ‘개성’은 타고 난 것이라고 합니다.

‘언어’와 같은 것을 ‘공통 이해’라고 하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수학’과 같이 증명을 통해 무언가 옳음을 알게하는 것을 ‘강제 이해’라고 말합니다. ‘공통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문명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합니다.
젊은 이들을 교육할 때, 개성을 기르라는 바보같은 말 대신 부모와 친구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 노숙자의 마음이나 생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말합니다.

제4장 : 萬物流轉, 정보불변

어제 잠자기 전의 ‘나’와 잠에서 깬 후의 ‘나’는 어찌보면 다른 사람입니다. 잠자는 사이에 성장하거나 노화하는 등 분명히 무언가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다시 태어났다는 실감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뇌의 작용 때문인데, 인간의 뇌는 사회생활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이처럼 ‘자기 동일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매일 아침 다른 사람이 되어서 도저히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루하루 변화하는 생명체인 나 자신이 변하지 않는 ‘정보’로 변해버리는 상태를 ‘의식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의식 중심 사회 – 이를 뇌화(腦化)라고도 표현하는데, 따라서 현대 사회는 ‘정보 사회’, ‘뇌화 사회’, ‘의식 중심 사회’라고 규정합니다.
또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같다는 식으로 자기를 정보로 규정하는 인간을 ‘근대적 개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 예로, 옛날에는 어릴 적 이름과 어른이 된 다음의 이름이 달랐고, 마음만 먹으면 더 많이 바꿀 수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한 번 정해진 이름을 바꾸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계속 변하는데 말입니다.

인간의 뇌는 매우 거대해졌는데, 이 뇌를 유지하려면 쓸데없는 생각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뇌가 반응하기 위한 자극이 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뇌는 ‘자급자족’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아무 쓸모는 없지만, 어쨌든 입출력을 거듭하면서 머리를 마구 돌립니다. 돌리지 않으면 뇌는 퇴화됩니다. 인간이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하네요.

제5장 : 무의식, 몸, 공동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일본의 옴진리교가 급속하게 전파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의 ‘신비 체험’을 따라한 ‘추체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아사하라는 요가 수행을 어느 수준까지 해서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알고 있는데 반해 제자들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교주의 예언이 적중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한 번도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던 젊은이들에게 교주 아사하라의 ‘예언’은 경이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어른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아기는 몸을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학습을 해나가는 데 반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입력은 물론이고 출력도 한정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일이 전문화된다는 것은 ‘입출력이 한정’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건강한 상태란 늘 다양한 입출력을 반복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구조조정은 개인을 공동체 바깥으로 밀쳐내는 것이므로, 정말로 공동체가 살아 있다면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우리는 도시라는 뇌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집 주위는 도심이면서도 근처에 공원이 있어서 좋다”면서 마치 도시에서 자연을 즐기며 살아가는 듯이 착각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도시는 처음부터 행정기관이나 권력이 기획하여 만든 뇌화 사회입니다. 따라서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의식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의식의 세계에 젖어 무의식을 잊어버린 것이죠.

무의식을 버렸으니 사람들은 늘 깨어 있으려고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하다가 갑자기 푹 쓰러져 잠에 빠지는 젊은이들이 그러합니다. 올빼미 생활을 하게 되는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네요.^^

좌뇌와 우뇌가 분리된 환자가 구두를 벗으려 하면, 좌뇌는 구두를 벗으려 하는데 우뇌는 오히려 신으려 합니다. 오른손은 양말을 벗으려 하는데 왼손은 오른 손을 제지하려 합니다. (이런 예는 저도 TV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환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망설이고 고민할 경우 그런 상태에 빠지는데, 이로 인해 의식과 무의식이 정반대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살아가는 한 고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6장 : 바보의 뇌

현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뇌는 무엇이 다를까요? 여러가지 비교를 해보았지만 무의미하고 결국 ‘사회적 적응성’으로 측정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기억의 달인이 사회 적응을 못한다면 그가 현명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뇌의 신경세포는 ‘뉴럴 네트워크’ 모델로 설명됩니다.
신경 세포 자체는 흥분하느냐 또는 흥분하지 않느냐는 두 가지 중 하나의 상태로 놓여있으며, 흥분하는 시간은 10밀리세컨드(밀리세컨드는 1,000분의 1초)의 아주 짧은 순간입니다. 이렇게 세포가 여러 가지 자극을 받아 자극의 총합이 어느 ‘역치’에 달할 때 그 자극을 받은 세포가 시냅스(synapse;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의 접촉부분)를 매개로 반응을 합니다.
천부적인 운동 선수의 경우 보통 사람보다 이 전달 속도가 빠른 경우입니다. 이 때 빠르다는 것은 중간의 시냅스를 생략하고 건너뛰는 경우입니다. A → B → C → D로 전달되어야 하는데, 선천적 또는 훈련을 통해 A → D로 바로 가는 경우라는 겁니다.

2장에서 소개한 y=ax 방정식으로 설명하자면, ‘전문가’라는 사람은 대체로 a의 값이 극단적으로 편향된 사람을 말합니다. a가 극단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분야가 그의 전문 분야라는 것입니다.

제7장 : 수상쩍은 교육

제대로 된 교육이란 ‘정보(이 책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가 아니라 ‘자연’을 가르쳐야 한다고 합니다.
도쿄 대학 학생에게 두 개의 머리뼈를 보여주면서 차이점을 설명하라고 했더니 “교수님, 이 쪽이 더 큽니다.”라는 어이없는 대답이 나왔는데, 이는 실물을 보고 사고하는 습관이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장의 내용은 참 약합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잘 모르겠네요. 이 책 전체적으로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 시냅스가 제대로 연결되지 못해서…ㅋㅋ)

제8장 : 일원론을 넘어서

아마 결론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란 편해지고 싶으면 뇌 속의 계수를 고정시켜 두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계수 a를 고정시켜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일원론입니다. 사고를 정지시켜 버리면 그것보다 더 편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슬람과 미국의 전쟁은 일신교끼리의 집안 싸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신교 사람들은, ‘저 사람과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그냥 내버러두자’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저것들은 악마이다’라고 규정하고 제거하려 합니다.


아~ 머리가 아픕니다.
도대체 이 책이 말하려는 게 뭔지 잘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일원론의 편견을 버리고 공통의 이해를 넓히라는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뭔가 억지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상식’이라고 불리우는 공통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개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바보같은 짓이다. ???

“‘인간’이란 말로 그 모든 다른 인간을 똑같이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보면 전부가 제각기 다르니까 말입니다.”(p.76)

‘언어’라는 공통의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문명의 발전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해놓구선, 그렇게 말하지 말라?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좋게 좋게 해석하면 좋은 결론을 만들 수는 있겠으나 책의 곳곳에 논리적인 흐름이 다소 결여된 면이 보입니다.

참고로 역자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이라면 그럴 것이라는 일반적 인식의 범위에 맞게 행동하고 사고하는 것이 현명함의 척도이며 전부라는 결론에 이르는 저자의 혜안을 만나면서, 이 책이 왜 일본 사회에서 그렇게 널리 읽히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전 이해 못하겠습니다.
“인간이라면 그럴 것이라는 일반적 인식의 범위”, 이게 있기나 한 겁니까?
‘인간’이라는 말로 그 모든 다른 인간을 똑같이 표현해서는 안 된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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