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계하려 말고 아이 도우미가 되라

경향신문 2010년 5월 11일 화요일 22면 손병목의 학부모 마음 읽기

[원고 원본] 충고하지 말고 도와주라

초등학교 3학년 재선이가 지나간 자리는 늘 쓰다만 물건들이 이리저리 널려 있다. 재선이 엄마가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듣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재선이는 종종 엄마로부터 야단을 맞는다. 5학년 예지는 고학년인데도 학교 준비물을 곧잘 잊어버린다. 예지 엄마는 등교 후에 예지에게서 전화가 오면 ‘오늘은 또 무얼 빠뜨리고 갔냐’는 생각에 자동적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3학년 은영이는 친구들을 초대해서 재미있게 놀다가도 늘 다투면서 끝낸다. 친구끼리 싸우지 말라는 엄마의 충고는 잔소리쯤으로 치부하는 것 같다. 6학년 수민이는 숙제든 뭐든 시작하기가 어렵다. 금방 시작할 듯하다가도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늘 엄마에게서 한소리를 듣고 난 다음에야 시작한다. 2학년 재희는 이유 없이 짜증을 내곤 한다. 배가 고프거나 문제가 잘 안 풀리거나 몸이 좋지 않을 때 짜증을 내는 것 말고는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 6학년 본영이는 머리는 좋은 것 같은데 성실하지 않다. 아는 문제인데도 실수해서 틀리는 것이 다반사다. 엄마는 늘 본영이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너는, 하면 잘할 것 같은데 안 해서 문제야.”

위의 사례는 서로 다른 문제인 것 같지만 크게 보면 하나의 문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실행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다. 실행기능은 신경과학 분야에서 쓰이는 용어다.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여러 기술을 일컫는 말인데, 위의 모든 사례는 실행기능이 불완전하게 발달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실행기능은 충동적 행동을 자제하는 ‘반응억제’, 복잡한 일을 수행하는 동안 정보를 기억하는 ‘작업기억’, ‘감정조절’, ‘주의집중’, 대책 없이 미루지 않고 시작하는 ‘과제개시’, ‘계획수립’, ‘정리’, ‘시간관리’, ‘목표집중’, 장애가 생겼을 때 계획을 수정할 수 있는 ‘융통성’,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초인지’ 등의 기능을 통칭하는 말이다. 아주 간단한 일을 하나 처리하는 데도 많은 실행기능이 요구된다. 학교 숙제만 하더라도, 일단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자리에 앉아야 한다(반응억제). 책상 앞에 앉았다고 하더라도 잡생각들을 물리치고 숙제를 시작해야 한다(과제개시). 막상 숙제를 하려다보니 너무 많다. 학원 숙제도 있고 저녁에 꼭 봐야할 프로그램도 있는데 계획을 잘 세워 중요한 일부터 해야 한다(계획수립, 시간관리). 조금 피곤하지만 집중해서 해야 한다(주의집중, 목표집중). 숙제를 끝내면 꼭 가방에 미리 챙겨두어야 한다(작업기억).

정리정돈을 못하고, 주의집중을 못하는 아이라도 지능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다만 실행기능이 좀 떨어질 뿐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이라고. 집중하면 되는데 게을러서 그런 것이라고. 못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더 나쁜 것이라고 아이에게 훈계를 한다. 그러나 할 줄 아는 것과 그것을 늘 제대로 해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누구나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그 시간에 집중하여 공부할 줄 아는 아이는 드물다. 이미 그림책을 통해 부모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것을 알지만, 막상 짜증이 나면 여과 없이 드러낸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른 이유는, 행동은 실행기능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기능을 주로 담당하는 두뇌의 전두엽 부위는 20세 전후까지 발달한다고 하니,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에게 어른 수준의 실행기능을 요구하는 것은 욕심이다. 실행기능은 노력을 통해 어느 수준까지는 누구나 발달시킬 수 있다. 그러나 사람마다 강점과 약점이 있어, 주의집중능력은 뛰어나지만 정리정돈 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고, 여러 일을 잊지 않고 처리할 수 있는 작업기억능력은 뛰어난데 정작 융통성이 떨어져 일을 그르치는 사람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부모의 강점이 아이의 약점일 때이다. 정리정돈을 잘하는 부모와 그렇지 않은 아이, 계획수립과 주의집중이 뛰어난 부모와 산만한 아이가 만나면 집안은 자주 전쟁터로 바뀐다. 아무리 타일러도 개선이 없을 때 부모는 아이가 부모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화를 내고, 아이의 행동을 바꾸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아이의 행동은 쉽게 바뀌지 않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잔소리에 엄마도 지쳐간다.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그것이 되는 사람이 있고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물론 몇 달 간의 피나는 노력을 하면 바꿀 수는 있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아침형 인간으로 바뀌려면 생활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그 어떤 것보다 저녁에 일찍 잠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잘 안 된다. 몇날 며칠을 시도해보다가, 일찍 일어났는데 오후에 몽롱한 상태를 여러 번 경험한 후에는 체질적으로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없다고 포기한다. 생활을 바꾸지 않고서는 저녁형 인간이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없고, 아침형 인간이 저녁형 인간이 될 수 없다.

아이의 능력 부족을 단순히 ‘게으름’으로 치부할 때 아이는 부모를 신뢰하지 않는다. 아이가 어려워하는 것을 ‘왜 그걸 못해?’라고 말할 때 아이는 자신에게 힘든 일이 실은 매우 쉬운 일이라는 데서 자존감을 상실하고 만다. 수영을 배우면서 잡아주는 손을 뗄 때, 두발 자전거를 배우면서 잡아주던 손을 살짝 뗄 때, 그때가 가장 강력한 격려와 지지가 필요한 순간이다.

아이에게 부족한 실행기능을 개선하려면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충고와 훈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다. 궁극에는 아이가 그 능력을 스스로 갖추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러기 위해 충분한 도움을 줘야한다. 아이가 당장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아이의 부족한 능력을 보완할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을 먼저 개선하고, 아이에게 체계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 일을 시작할 때 꾸물거리거나 감정조절을 잘 하지 못하는 등 실행기능에 문제가 있는 아이의 행동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 주에 자세히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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