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가보를 다시 찾은 기분입니다. 우연히 옛책을 뒤지다 발견했습니다.
예전엔 책을 사면 서점에서 책 표지를 싸줬습니다. 아마 학교 앞 사회과학 서점에서 산 듯한데, 책 표지에 싸여 있어 여태껏 발견을 못했나 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무척이나 찾고 싶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어제 칼럼에 어느 정도 얘길해서 더 말하진 않겠습니다).
14년 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노신에 대해서는, 《아큐정전》이나 《광인일기》와 같은 몇몇 단편 외에는 읽은 적이 없어, 한마디로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명성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신영복 선생은 이 책의 서문을 통해 “단지 한 사람의 노신 애독자에 불과한 필자가 감히 이 책의 앞쪽을 더럽히기를 마다하지 않는 까닭도 아마 이러한 공감을 공유하고 싶은 소망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로 인해 더더욱 경외감마저 듭니다.
제 목 :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
지은이 : 노신 / 유세종 편역
펴낸곳 : 도서출판 窓 (초판 출간일 1991.8.25 / 1991.9.16일 1판 2쇄 읽음)
대학교 다닐 때, 학교 앞 사회과학 서점을 자주 들렀습니다. 거기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였는데, 책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는 다음 구절에서 따온 것 같습니다.
“소인은 어쩔 수 없이 젊은이들을 위해 사닥다리가 될 각오를 하였으나 그들이 사닥다리를 밟고 오를 것 같지 않습니다. 슬픈 일입니다.!”(p.78)
책 제목만 봐서는 마치 중국의 젊은이들을 위한 가르침이나 교훈이 주된 내용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신은 곳곳에서 젊은이들의 한심하고 나태함을 탄식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성질이 급하다거나 책을 읽지 않는다거나 편협하다거나, 이런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청년들이란 사상이 단순하여 환경이 험악한 줄은 모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듣기 시원스럽고 통쾌하게 말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도로 큰 손해를 보고마는 것입니다.”(p.172)
가까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인 걸 보면, 아마 진심인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정말 중국과 중국의 젊은이들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편지 전반에 걸쳐 중국과 중국의 젊은이에 대한 사랑이 절절 넘쳐 흐릅니다.
“지금 시대는 사람이 살아나기가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쨌든 싸워서 광명을 찾아야 합니다. 설사 우리 자신은 그것을 못볼지언정 후세들에게라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갑시다.”(p.101)
실제로 그는 그렇게 살다 갔습니다.
이 책의 백미는, <삶의 기로와 막다른 기로에서>라는 첫 번째 편지입니다.
저는 이 편지에 감동하여, 한 문장을 골라 저의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그 때가 대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 <삶>이란 기다란 길에는 두 개의 큰 난관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기로>입니다. (…) 그러나 나는 울지도 않고 돌아서지도 않습니다. 먼저 기로에 앉아 한숨을 쉬거나 한잠 자고나서 갈만하다고 생각되는 길을 골라 계속 걸어갑니다. 혹시 성실한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서 음식을 얻어 요기를 좀 할지는 모르나 그에게 길을 묻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도 길을 모르리라고 단정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범을 만나면 나는 나무에 기어올라갑니다. 그놈이 기다리다 못해 배가 고파 가버린 다음에 내려옵니다. 만약 그놈이 가지 않으면 나는 나무에서 굶어 죽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은 다음에 시체마저도 그놈에게 먹히지 않기 위하여 죽기 전에 내 몸을 나무에 비끄러 매어 놓습니다. 그런데 만일 나무가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별 수 없이 그놈에게 잡아먹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도 그놈을 한입 뜯고 죽을 겁니다.
둘째는 <막다른 길>입니다. (..) 그러나 나는 기로에서 하던 방법대로 뛰어들어가서 가시덤불 속을 걸어갑니다. 나는 아직 완전히 가시덤불 뿐이어서 전혀 걸어갈 수 없는 곳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원래 막다른 곳이라는 게 없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 결론 지어 말하자면 내 자신이 고통에 대처하는 방법은 오로지 덮쳐드는 고통에 대하여 교란하며 망나니 같은 짓으로 승리를 삼고 억지로 개선가를 부르는 것을 낙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혹 장석침 선생이 말하는 설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에 가서는 여전히 <방법이 없다>는 데로 귀결됩니다. 정말 방법이 없습니다. (p.26~27)
방법이 없으니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온몸으로 부딪쳐 보라는 말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때부터 저의 좌우명은 <방법은 없다>가 되었습니다. 살면서 고통을 이겨낼 뾰족한 방법은 없습니다. 다행히 혁명의 시대를 살다간 노신 선생조차 “완전히 가시덤불 뿐이어서 전혀 걸어갈 수 없는 곳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니 정말 없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