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부모 마음 읽기]엄마는 공부 평가자가 아닌 조력자
손병목|학부모 포털 부모2.0(www.bumo2.com) 대표ㅣ경향신문 2010년 2월 9일 화요일 22면 손병목의 학부모 마음 읽기
도현이 엄마는 아이를 집에서 충분히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도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년 동안 직접 가르쳐봤는데 쉽지 않았다. 수많은 갈등을 경험했다.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가 못마땅해서 잔소리가 점점 심해졌다. 3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앞둔 어느 주말, 수학 문제집을 풀며 시험 대비 공부를 하다가 쉬운 문제를 줄줄이 틀리는 도현이에게 심하게 화를 냈다. 그러다 문득 혼자서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엄마가 화를 내는데도 아이는 별로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무기력하게 듣고만 있었다. 그 순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힘들고 아이는 아이대로 아무런 학습의욕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엄마는 도현이를 직접 가르치는 것을 포기했다. 수학학원을 등록해 다닌 지는 1년이 넘었고 지금은 다른 과목도 가르치는 전 과목 보습학원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도현이네 사례는 거의 모든 집에서 일어나는 현실이다. 특히 시험을 앞두고 엄마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고 아이와의 갈등이 심각해진다. 몇 번을 가르쳤는데도 또 틀리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이미 수차례 충분히 가르쳤는데 번번이 틀리는 이유를 엄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왜 가르칠 때 집중하지 않느냐”고 야단을 친다. 틀린 문제를 두고 엄마가 야단을 치면 대개의 아이들은 가만히 듣고만 있다. 스스로도 잘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아이는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된다. ‘왜 나는 이런 문제만 나오면 틀리는 걸까’ ‘분명히 몇 번 배운 것 같은데 왜 아직도 모르는 걸까’ ‘역시 내 실력으로는 이런 문제는 풀 수 없나봐’ 등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가르치려 한 것은 집중하는 자세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다. 그래서 아이가 엄마의 설명을 귀담아 듣고 이해한 다음에는 그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아이가 배우는 것은 “나는 할 수 없다”는 무기력이다.
이같이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생긴 무기력을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한다. 원래는 없었던 무기력을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아이들은 틀린 문제를 앞에 두고 무기력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습된 무기력은 공부의 최대의 적이며 공부 트라우마라고도 할 수 있다. 꽤나 오래가는 정신적 상처이기 때문이다. ‘나는 수학을 못해’ ‘나는 영어가 약해’ ‘나는 이해력이 부족해’ ‘난 창의력이 없는 것 같아’ 등과 같이 어릴 때 생긴 이러한 생각은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평생 지속된다.
도현이는 배우지 않은 문제가 나오면 노력으로 해결할 시도를 하지 않는다. 아는 문제가 나오면 기계적으로 풀어내지만,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 아이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평소 문제집을 풀 때 문제 번호 위에 ‘심화’ 또는 ‘난이도 상’이라는 표시가 있으면 일단 건너뛴다. 그리고 엄마의 설명을 기다리든지 해답을 본다.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거의 없다. 엄마가 아무리 열을 내며 반복해 가르친 문제라도 학교 시험에 나오면 별표를 표시한 채 건너뛴다. 이미 머릿속에 이런 문제는 시도해봐야 풀리지 않을 게 뻔하다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옆에 있어 도와주면 아이는 문제 해결의 자신감이 생기고 공부 의욕이 생겨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다. 학습 의욕과 자신감이 떨어진다. 이를 극복하려면 엄마는 아이 공부의 평가자가 아니라 조력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쉬운 문제를 틀리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또 틀렸니” “몇 번을 가르쳐줘야 이해하겠니” “지난번에 다 설명했잖아. 설명할 때 제대로 들었어야지” “왜 내 말에 집중 안 하니. 그러니까 계속 틀리잖아” “엄마가 설명하는데 어디 보니. 똑바로 앉아” “넌 자세가 틀렸어.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푸니까 그렇잖아” 등의 말을 반복해서 듣는 아이에게 자신감이 생길 리 만무하다.
이렇게 바꿔 말해보자. “지난번에 엄마와 함께 풀어봤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구나.” 아이에 대한 믿음이 전제된 말이다. 엄마의 모든 말은 아이에 대한 믿음이 전제돼야 한다. 기억이 났으면 풀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틀린 것이다. 아이는 일부러 틀리지는 않는다. “아, 이런 문제를 어려워하는구나” “이런 문제를 주로 실수하는구나” 등은 감정을 섞지 않고 사실만 말하는 방법이다. 아이의 의도를 의심하거나 자세를 탓하지 말고 이런 유형의 문제를 어려워하는 현재의 사실만 말하면 된다. 그리고 아이에게 어떤 식으로 가르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