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문집

읽을수록 은은한 맛이 나는 책이 있습니다. 대개 고전이 그러한데, 이번에 〈사기〉를 읽으면서 그 맛을 또 느꼈습니다.
변화경영연구소 구본형 소장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기》를 읽다보면, 책 속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옵니다. 갑옷을 입고 튀어 나오기도 하고 유건에 학창의를 입고 수염을 달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서해문집에서 나온 《사기 2》를 읽었습니다.
백이·숙제, 진 문공, 초 장왕, 공자, 노자·장자·한비자, 소진, 악의·전단, 염파·인상여, 평원군, 신릉군, 항우·유방, 소하, 조참, 장량, 석분, 이광, 주가·곽해, 골계열전, 화식열전, 질도 등을 담고 있습니다. 《사기》 원전을 기준으로 보면, 제왕의 이야기인 〈본기〉와 제후들의 이야기인 〈세가〉, 그 밖의 다양한 이간 군상들의 이야기인 〈열전〉을 뒤죽박죽 섞어 놓은 셈입니다. 서해문집의 《사기 1,2,3》 시리즈는 원전 《사기》의 순서를 편자가 자의적으로 섞어놓았는데, 오히려 읽기가 편하고 흥미진진합니다.


   제   목 : 사기 2 – 진실로 용기있는 자는 가볍게 죽지 않는다.
   지은이 : 사마천 / 김진연 편역
   펴낸곳 : 서해문집 (2004.2.1일刊 새 개정판 4쇄를 읽음/ 값 8,700원


모든 책이 그러하겠지만 《사기》는 처음 읽을 때와 다시 읽을 때 그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제 경우만 보자면, 처음에는 ‘이야기’를 위주로 봤습니다. 익히 들어왔던 유명한 이야기, 어디선가 들었음직한 이야기가 《사기》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다시 읽으니, 이야기 속의 주인공도 주인공이지만, 그들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는 사마천의 존재가 단연 돋보입니다. 갑옷을 입고 튀어 나와 창칼을 휘두르던 자리에 궁형의 치욕을 겪으면서까지 오로지 사명감 하나로 글을 쓰고 있는 사마천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장면이 고정됩니다. 결연히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 사마천의 모습은 마음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사기 2》에는 《사기》를 《사기》답게 만드는 중요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백이열전〉에 해당되는 백이·숙제편과 〈화식열전〉입니다.

백이·숙제의 이야기는 《사기》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로서의 사마천의 소명의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부분입니다. 현실은 비록 불운했지만 의롭게 살다간 모든 이들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의지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백이·숙제의 이야기가 공자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듯이, 사마천 자신이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는 까닭은 오로지 《사기》를 남기기 위한 사명감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는 매우 많이 인용되는 까닭에 그만 하고, 오늘은 〈화식열전〉에 대해 주로 얘기할까 합니다.

〈화식열전〉은 상공업으로 부를 거머쥔 사람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貨’가 재산을 뜻하고 ‘殖’이 불어난다는 뜻이니, 어떻게 해서 재산을 불렸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세에까지 지속된 전통적인 중농억상(重農抑商)이 최소한 사마천에게는 통하지 않나봅니다. 오히려 “부(富)는 사람의 본성인지라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열심히 추구하기 마련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비록 이 책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원문을 보면 〈화식열전〉 첫 머리에서 사마천은 “평민의 신분으로 정치를 혼란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일을 방해하지도 않았으며 거래를 융통 있게 해서 재산을 늘렸다. 그래서 제69에 〈화식열전〉을 서술한다.”라고 썼습니다. 거래를 융통 있게 해서 재산을 늘린 것은 오히려 널리 알리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농업 뿐만 아니라 상업과 공업 등을 모두 중시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화식열전〉을 읽다보면, 수 천년 전의 생각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사마천의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집은 가난한데 어버이는 늙고 처자식은 어리고, 철 따라 조상의 제사도 지낼 형편이 못 되며 의식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서도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구제할 수 없는 인간이다. (……)
재산을 증식하는 데 있어 위험한 방법을 피하고 안전한 길을 택하려 하는 것은 현명한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농업을 통하여 재산을 모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고, 상업이나 공업에 의한 방법이 그 다음이요,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나쁜 방법이다. 또한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묻혀 사는 청빈한 선비나 기인도 아니면서, 줄곧 가난과 천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입으로만 인의를 운운함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대개 서민들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열 배가 넘으면 그를 무시하고 헐뜯으며, 백 배가 넘으면 그를 두려워하고, 천 배가 넘으면 그의 심부름을 달게 하고, 만 배가 넘으면 그의 하인이 되고 마는데,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를 얻는 방법으로는 농업이 공업만 못하고 공업은 상업만 못하다. 열심히 뜨개질을 하느니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는 것이 낫다는 말을 가난한 사람들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백이와 숙제처럼 무균질의 인격체도 아니면서, 만약 그렇다면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묻혀살 것이지, 그렇지도 않으면서 때맞춰 제사도 지낼 형편이 못되는 주제에 입으로만 윤리를 내세우는 게 부끄럽지 않느냐는 호통. 그것은 곧 부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가 인간의 본성임에도 겉으로는 고고한척, 그러면서 뭇 백성들에게는 예의염치를 강조한 지배층에 대한 풍자이기도 합니다.

읽을수록 감동이 깊어지는 《사기》 – 사마천의 글은 역사서를 뛰어 넘은, 역사의 혼이 담긴 불세출의 문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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