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만 하면 노장(老莊)입니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제 목 :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지은이 : 장일순 / 이현주
펴낸곳 : (주)도서출판 삼인 (개정 합본 초판 출간일 2003.11.25) / 2004.10.15일刊 개정 초판 4쇄를 읽음 ₩25,000
이상하게 노자·도덕경은 읽었다고 하는 표현이 잘 안 어울립니다. 읽었다는 말이 마치 눈으로 봤다는 말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그런가 봅니다. 눈으로만 봐봐야 아무런 감흥도 없는 책이 《도덕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보면 볼수록, 깊이 되새길수록 묘(妙)한 것이 《도덕경》입니다.
《도덕경》만큼 많은 주석본이 있는 고전이 드뭅니다. 원문은 비록 짧지만 그 자체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역시 또 하나의 주석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이 아무개 목사가 장일순 선생으로부터 노자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대담 형식입니다. 두 분의 대화로 이루어지는 이 책은, 그 형식의 독특함 못지 않게 이해하기 쉬운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원래 이 책은 1993년 장일순 선생 생전에 두 권이 출간되었고, 사후 한 권이 출간되어 모두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후에 한 권으로 합본하여 출간됐습니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옮겨 책으로 출간한 이 아무개 목사는 관옥 이현주 목사를 말합니다.
무위당(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1928년 원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학과에서 수학하던 중 6·25 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한 채 고향 원주로 돌아가 40여년 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지역 사회에 뿌리내린 사회 운동가로서 살다 가셨습니다. 원주대성학원을 설립하고, 밝음신용협동조합의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한살림운동을 주창하였습니다.
1970년대 유신독재 시설, 천주교 원주교구의 선구적인 저항, 가톨릭 농민회의 민중운동, 김지하 시인의 투쟁, 1980년대에 한살람운동 등이 원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것만 보아도 선생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장일순 선생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970년대 원주 지역이 반독재 투쟁의 주요 거점이 된 데에는 장일순 선생과 지학순 주교를 빼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특히 장일순은 정치활동의 전면에는 결코 나서는 법이 없이 항상 뒤에서 반독재 투쟁을 지원하면서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하였습니다.
장일순 선생은 청강, 무위당, 일속자 등의 호를 썼습니다. 유학과 노장사상에도 조예가 깊었고, 특히 최시형(崔時亨)의 사상과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아 일명 ‘걷는 동학(東學)’으로 통했습니다. 1994년, 67세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주석(註釋)은 ‘알기 쉽게 풀이한 글’을 말합니다. 1차 번역에 따른 새로운 해석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석에만 머문다면 번역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석은 ‘해석’이 아니라 ‘적극적인 읽기’ 행위입니다. 새롭게 읽는 것은 곧 ‘창조’ 행위입니다. 따라서 주석은 옛말을 오늘날의 말로 옮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 고전을 현재의 삶·오늘의 문제와 연결지어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지혜의 가교여야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는 그 옛날의 《도덕경》으로 현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훌륭한 가교입니다. 더욱이 장일순 선생의 생전의 삶이 책 속에 담긴 말의 진실성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 독자들로 하여금 눈이 아닌 가슴으로 읽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의 성향 탓인지 지나치게 기독교적인 색채가 짙게 배어있습니다. 사실 노자의 《도덕경》과 신약성서의 유사성은 이미 많은 책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노장 사상이 서구에서 유행하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분석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이 책을 《도덕경》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한 주석이라고 단순 평가하는 것은 심한 오독(誤讀)입니다. 선생이 누차 반복하듯이, 어떤 글이든 ‘보는 자리’가 중요합니다. 노자의 ‘도(道)’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그러합니다.
선생은 때로는 예수의 눈으로, 때로는 동학의 최시형 선생의 눈으로, 불가(佛家)의 눈으로, 공자의 눈으로 노자 할아버지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거기에는 ‘자기’가 없습니다. 즉 장일순이 없습니다. 자신의 입을 통해 자신의 언어로 얘기하되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리에서, 최시형은 ‘한울님’의 자리에서, 불가에서는 ‘부처’의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말을 할 뿐,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뒷전입니다. 너와 나의 구분이 어디에 있느냐는 식입니다. 선과 악, 미와 추를 여읜 자리에 그가 있는 듯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노자의 말을 빗대어 말하되 그것이 곧 무위당 자신이 세상을 보는 눈과 다름 아닙니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 읽고 덮어둘 책이 아닙니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두고두고 다시 펴봐야할 책입니다.
오늘 아침, 욕심 내지 않고 두 장만 뽑습니다. 뽑아 옮기는 데는 2분이지만 내 삶으로 만드는 데는 20년이 걸려도 부족할 것입니다.
성인(聖人)은 모든 일을 무위(無爲)로써 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베풀며 만물을 이루어내되 그 가운데 어떤 것을 가려내어 물리치지 않으며 낳고는 그 낳은 것을 가지지 않고 하고는 그 한 것을 뽐내지 않으며 공(功)을 이루고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머물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다.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去. -2장 중에서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못하다. 착한 사람은 말을 잘하지 못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착하지 못하다. 아는 사람은 아는 게 많지 않고 아는 게 많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성인은 쌓아두지를 않는지라 있는 것으로 남을 위하되 자기는 더욱 있게 되고 있는 것으로 남에게 내어주되 자기는 더욱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이로움을 주되 해를 끼치지 않고 성인의 도는 하되 다투지를 않는다.
信言不美, 美言不信. 善者不辯, 辯者不善, 知者不博, 博者不知. 聖人不積, 旣以爲人,
己愈有, 旣以與人, 己愈多, 天之道, 利而不害, 聖人之道, 爲而不爭. -81장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