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상담 게시판
손녀 상담
독자입니다. 아이 부모는 아니고, 손녀를 돌보고 있습니다. 우리 손녀가 엄마를 닮아 부끄러움이 많이 탑니다. 그래도 어린이집에서는 선생님들의 보살핌 속에 잘 적응해서 그런대로 활달했는데, 유치원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집에 와서는 엄마 아빠에게 유치원에 대해 모두 말하고요. 그래서 제가 언젠가 왜 유치원에서 말을 안해? 그랬더니 부끄럽다, 친해지면 말하겠다고 하면서도, 유치원에 처음 갔을 때 무슨 줄을 섰는데, 손녀는 줄을 잘 서고 있었는데 다른 애가 어떻게 했는데, 선생님이 이유를 묻지도 않고 손녀에게 뭐라 했나 봐요. 나는 잘못이 없고 그 얘가 잘못했는데 선생님이 이유도 묻지 않고 나한테 꾸중해서 화났어, 그래서 더 말하기 싫어 라고 하더라구요. 아무튼 지금도 거의 유치원에서는 말은 하지 않지만 그외 적응은 그런대로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애 엄마가 걱정이 되어서, 의사가 운영하는 센터에 가서 상담을 했는데, 아이가 온실속에 화초 같이 성장해서 그런다면서 결과 보다는 과정을 칭찬해 주면 좋아질거라 했습니다. 부모 아닌 할아버지가 뭐라고 이 나이에 이런 걱정을 합니다.
책을 보니 과정을 칭찬해 준다고 하셨는데......말은 쉬운데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손녀 사랑이 정말…. 저도 손녀가 생기면 이렇게까지 마음을 쓸까 싶네요.
부모도 아닌 할아버지가 이 나이에 무슨 걱정이냐고 하셨는데, 이 문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할아버지가 손녀의 유치원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고, 그 아이 말투까지 옮겨 적을 수 있다는 것. 손녀는 이미 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녀 이야기를 다시 한번 보셔요. 말을 못 하는 아이가 아닙니다. 어쩌면 안 하기로 한 아이입니다.
"부끄럽다, 친해지면 말하겠다." 이건 계획입니다.
다섯 살, 여섯 살 아이가 자기 기준을 세우고 그걸 어른에게 설명한 겁니다.
그리고 줄 서던 날 이야기. 나는 잘못이 없는데 선생님이 이유도 묻지 않고 나를 꾸중했다,
그래서 화가 났고, 그래서 더 말하기 싫다.
원인과 감정과 결정이 한 줄로 이어집니다.
이 나이에 억울함을 이렇게 정리해서 말하는 아이는, 제가 보기에는 흔치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의 방향을 조금 바꾸셔도 됩니다.
유치원에서 말을 안 하는 것보다, 집에 와서 다 말한다는 것이 훨씬 큽니다.
말할 데가 있는 아이는 괜찮습니다. 아이는 밖에서 받은 것을 집에서 풀어놓으며 자랍니다. 손녀는 그걸 하고 있습니다.
이제 과정 칭찬 이야기입니다. 말은 쉬운데 해보면 어렵다고… 맞습니다.
결과는 눈에 보이고 과정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했다"는 결과만 보면 나오는 말이고, "열심히 했구나"는 아이가 하는 동안 옆에서 봐야 나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과정 칭찬은 말하는 기술이 아니라 보는 기술입니다.
보지 않은 것을 칭찬하려니 어색한 겁니다.
그런데 이미 하고 계십니다. "왜 유치원에서 말을 안 해?"
이 질문에 손녀가 그렇게 길게 답했다는 건, 할아버지가 끝까지 들어줬다는 뜻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만 더 가시면 됩니다.
칭찬할 말을 찾지 마시고, 들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시면 됩니다.
"이유도 안 물어보고 혼내서 억울했겠다."
"그래도 줄을 계속 잘 서고 있었네."
첫 문장은 감정을 읽어주는 말이고, 둘째 문장이 과정 칭찬입니다.
새로 지어낸 말이 아니라 손녀가 한 말 속에 이미 있던 것을 꺼낸 겁니다.
과정 칭찬은 결국 이겁니다. 아이가 한 일을 아이 말로 되짚어 주는 것.
센터에서 들으신 '온실 속 화초'라는 말은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부끄러움 많은 아이는 약한 아이가 아니라 신중한 아이입니다.
낯선 곳에서 먼저 살피고, 믿을 만하다 싶으면 그때 마음을 엽니다.
그 속도가 남들보다 조금 느릴 뿐입니다. 그런 아이는 밀어붙이면 닫아버립니다.
기다려주는 어른이 한 명 늘어날 때마다 조금씩 열릴 겁니다.
어린이집에서 활달했던 걸 보면, 손녀는 열리는 법을 이미 압니다.
지금처럼 물어봐 주시고, 끝까지 들어주시고, 들은 대로 돌려주시면 됩니다.
손녀에게 억울함을 말할 어른이 엄마 아빠 말고 한 사람 더 있다는 것.
아이는 그런 어른 한 사람으로 밖에서 견딜 힘을 얻습니다.
손녀는 친해지면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집에 세 사람이나 있으니, 유치원에도 곧 한 사람쯤 생길 겁니다^^
— 손병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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